“우라늄-238은 중성자에 의해 분열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방출된 중성자를 흡수해. 그래서 우라늄에서 핵반응이 시작된다 해도 중성자 수가 모자라게 되고 빠르게 핵분열이 될 수 없는 거야.”
이런 대사가 2시간 내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연극이 있다. 영국 극작가 마이클 프레인이 쓴 ‘코펜하겐’(31일까지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은 2차 세계대전을 앞둔 1940년대를 배경으로 20세기 과학사에 손꼽히는 물리학자 닐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사이에서 일어난 미스터리한 사건을 소재로 삼는다. 상보성 원리, 불확정성 원리 등 당대 최신 물리학 이론은 물론 역사, 음악 등 장르를 넘나들며 관객들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작품에서 배우 남명렬(57)은 2009년, 2010년에 이어 세 번째로 주인공 닐스 보어 역을 맡았다.
“대사가 어렵다든지 심각하게 분석을 많이 해야 하는 역할이 나오면 연출가들이 저를 많이 떠올리는 거 같아요.” 남명렬은 19일 서울 대학로에서 한국일보와 만나 “연기력과 상관없이 ‘골치 아픈 중년 이상 배역’이 나오면 ‘저 사람이면 어느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는 것 같다”며 웃었다. 진중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그는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의 바둑 스승 역을 비롯해 최근 2, 3년 잇달아 출연한 연극 6편에서 모두 지식인 역할을 맡았다.
제작진은 ‘골치 아픈 연극의 중년 주역’으로 당연히 이 배우를 떠올렸을 테지만, 남명렬은 왜 이 작품을 택했을까. 그는 “2009년 초연을 두산아트센터가 제작했는데 그 극장의 기획력을 신뢰하고, 윤우영 연출과 작업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기간이 겹치지 않으면 계속 무대 오르려고 하는데, 이유 중 하나는 (관객이 선호하는)연기 스타일도 계속 바뀌어서죠. ‘좋은 작품’에만 설 거라고 1년에 한 편만 하면 뭔지 모르지만 구닥다리 연기를 할 것 같아요. 후배들한테도 말하죠. 한 작품만 한다고 더 좋은 연기를 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다 나한테 속는 거”라면서도 대본에 분석을 내놓는다. “타인과의 협력을 추구하는 인간형이죠. 보어가 내놓았던 물리학 이론이 ‘상보성 원리’ 잖아요. 양자역학에서 물체가 어떤 실험을 하느냐에 따라 파동이나 고전적 입자의 성질도 영향을 받는다는 건데 이론과 사람의 기질이 비슷하다고 봐요. (상대역인)하이젠베르크라면 아마 그 많은 학자들을 코펜하겐학파로 이끌 수 없었겠죠.”
이렇게 줄줄 물리학 용어를 설명하기까지는 물론 고난의 시간이 있었다. “이전 맡았던 지식인들은 배경일 뿐이었지만, 코펜하겐 속 물리학 법칙은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실재적 소재’라” 초연 때는 연출가, 배우가 리딩 연습부터 관련 이론 서적을 잡고 서로 토론을 했단다. “이 대사가 막히면 저녁에 집에 가서 공부해서 발표하고, 다시 막히면 다음날 또 공부하고…. 리처드 파인만이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말했다는데 그 말을 실감했죠.”
6년 만에 다시 이 작품을 하는 그는 “과학용어로 무장했지만 사실 인간관계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상대 배우가 바뀌었으니 다른 작품이라고 해요. 그게 3번씩 무대 오르는 이유죠.”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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