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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졸(卒)과 졸(拙)

입력
2016.07.1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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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판의 졸(卒). 한 칸만 갈 수 있다. 앞이나 옆. 후퇴는? 안 된다. 룰을 만든 분께서 병졸이 뒤로 물러나는 건 차마 못 보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안에 졸장부의 드라마가 있다. 혼자서 적진으로 뚜벅뚜벅 갔다가는 어느새 교활한 상, 마, 차, 포의 먹잇감이 된다. 해서 뭉친다. 짝으로 붙으면 명이 좀 더 길다. 딱 붙어 다녀야 말이 쉽게 못 잡아서 견제가 된다. 후회 없는 전진이라고 판단될 때만 나아간다.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이기에 졸장부의 한 걸음은 그야말로 처절한 용단이다. 그래서 상대도 당황하기 일쑤다. 어찌해서든 졸이 운신하지 못하게 수를 써야 한다. 말을 졸 따위랑 바꿀 수야 있겠나.

그런데 이 졸이 막판에는 뚝심이 있다. 마지막 혈전의 와중에 먹잇감이 되어 산화를 할 때는 그 포스가 실로 장엄하다. ‘차’나 ‘포’를 당당히 껴안고 아낌없이 살신성인한다. 또 어쩌다 운이 좋으면 졸 두 개가 살아남아 적진의 왕을 향해 직진이다. 왕은 그야말로 구중궁궐에서 요리조리 내빼보려고 난리. 하지만 졸이 둘이면 얘기가 다르다. 몸집이 몇 배나 되는 왕일지라도 참담하게 몰린다. 남은 것은 최후의 일격, 졸장이요!

졸로 봤다가 큰코다치는 건 그래서다. 존재감도 없이 자잘하게 사는 것 같아도 잘 보면 어느새 거인처럼 그림자가 커져서 존재를 드러낸다. 그때의 졸은 그냥 보았던 그 졸이 아니다. 그래서다. 잘 쳐다보면 졸이 왕이다. 민중이 졸 아닌가. 물론 뭉친다는 전제. 갑질이 판치고 힘과 권력, 금력이 휘황해도 졸들 없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나. 졸을 졸로 알지 마시라.

사부님께 배웠다. 대교약졸(大巧若拙). 여기서 ‘졸’은 서툴다 이다. 총명한 사람은 뽐내거나 과장하지 않아서 도리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 그런데 이것이 연극이나 다른 장르의 예술에서 표현될 때는 그 고매함이 경이롭다. 사실 피카소나 샤갈이나, 이중섭이나, 마티스나 내 눈에는 다 ‘졸’로 보인다. 그런데 그 서투름 안에 대단한 미학이 살아 숨 쉰다. 어느 순간 경지에 도달하여 기교를 감추고 본질과 함께 놀고 즐기는 대가들의 넉넉함에 무릎을 절로 치게 된다는. 이제서야 나도 서투름의 매력을 알아가는 와중이다. 어떻게 하면 기교를 드러내지 않을 것인가,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자꾸 잔재주에 혹하는 것을 어쩌랴. 원로 연출가의 어떤 작품 중에는 리듬과 템포가 완전히 무시된 연극도 간혹 있다. 암전도 거칠고 미술도 대충이며 배우들의 동선까지 엉킨 듯한. 그런데 다 보고 나면 경건해진다. 형언할 수 없는 감동. 대가께서는 젊은 날에 정교하고 에너지 넘치는 작품들을 숱하게 만드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신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가의 솜씨가 이제 별로라고 입방아다. 나는 그런 생각이나 말을 감히 담을 겨를이 없다. 분청사기 같은 고졸함이 실로 경지 아닌가.

장기판의 졸이든, 예술의 졸이든, 언뜻 보면 잘 안 보인다. 그런데 깊이 사랑하고 그 본질을 자꾸 보려 하면 어느새 함부로는 절대로 재단할 수 없는 위대한 그 무엇이 보인다. 그래서 졸은 결코 졸로 존재하는 법이 없다. 그 자체로 이미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흡사 부처다.

잘 나가는 한 교육 공무원께서 민중을 졸로도 아니 보고 가축으로 정의하셨다. 혹시 사료를 대주는 사육사쯤 되시려나. 취중발언이라도 너무 막가셨다. 공무원들의 어떤 부류에서 이런 풍조가 퍼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쉬 넘기지 말고 공무원의 태도와 기강을 반듯하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사드 배치문제로 나라가 시끄럽다. 하지만 설득의 절차가 민주주의 아닌가. 너무 성급하여 서툰 ‘졸’로 꼬였다. 민중을 졸로 보지 마시라. 졸속으로 돌아가지는 말게 해주시라.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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