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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 안전 문구에 가습기 살균제 사용… 기업 죗값을 왜 국민 생명으로 치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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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 안전 문구에 가습기 살균제 사용… 기업 죗값을 왜 국민 생명으로 치르나”

입력
2016.07.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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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김미란씨는 한국일보와 만나 “아이들을 안전한 나라에서 키우게 해주세요. 그러기 위해 필요하다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김미란씨는 한국일보와 만나 “아이들을 안전한 나라에서 키우게 해주세요. 그러기 위해 필요하다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기업이 이윤에 급급해 마치 국민을 실험대상 삼듯이 제품을 아무렇게나 만들고, 사람이 죽어도 얼마 안 되는 돈으로 해결을 보려는 나라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울 수 있겠어요? 대한민국에서 둘째를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2008년부터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사용했다가 지난해 10월 아버지(사망 당시 68세)를 떠나보낸 김미란(41)씨는 지금도 눈 감는 순간까지 산소통을 끌고 다니며 호흡 곤란을 겪던 아버지 모습을 잊지 못한다. 자신도 2009년 애경의 제품을 사용했다가 축농증(만성 부비동염)과 비염 등 질환을 얻은 김씨는 최근 남편, 딸과 함께 정부의 4차 가습기 살균제 피해조사 접수를 준비하고 있다.

김씨는 가습기 살균제를 쓰던 당시를 생생히 기억한다. 밥을 짓기 위해 가스레인지를 켰을 때 평소 푸른색이던 불꽃이 가습기만 틀면 빨간 색으로 변했다. 가습기를 사용한 뒤로는 새벽마다 가슴이 답답해 잠에서 깬 적이 비일비재했다. 김씨는 “기분이 이상해 아버지께 살균제를 버리라고 했더니, 되려 ‘제품에 99.9% 안전하다는 문구가 있다. 신생아가 써도 된다고 하지 않느냐’며 나를 안심시켰다”고 가슴을 쳤다. 그는 이어 “안전한 제품이니 정부가 판매를 허락했을 거라 믿은 아버지는 결국 국가에 배신을 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가피모)에서 피해구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제조물에 대해, 악의나 중대과실로 큰 피해를 낳는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배상하게 만드는 제도가 한국에는 왜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랬다면 옥시 같은 기업들이 연구비를 아끼느라 흡입독성 실험을 건너뛰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김씨는 “죄는 기업이 져놓고, 그 죗값은 국민이 생명으로 치르는 일이 없도록 징벌적 손배제가 반드시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이런 제도가 없는 탓에 한국의 소비자들이 차별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김씨는 “디젤차 배출가스 조작 사태만 봐도 폭스바겐이 미국과 한국에 보상하는 정도는 천지차이”라며 “한국인만 다국적 기업에 호구 노릇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찬호 가피모 대표는 “올해 5월 미국 법원은 난소암을 유발시킨 파우더를 만든 존슨앤존슨이 피해자에게 620억원대의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라고 판결했지만, 옥시는 수차례 입장을 바꾸고서야 겨우 보상금 3억원을 내놓겠다고 하고 있다”며 “미국인과 한국인의 목숨값이 20배가 차이 난다”고 꼬집었다. 그는 “보통 징벌적 손배제가 적용되려면 가해자의 고의가 입증돼야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 사태 같은 국가적 참사에는 별도 규정을 통해 처벌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제조물에 대한 징벌적 손배제 입법화 논의를 앞두고 있는 국회에 이렇게 물었다. “한국이 정보기술(IT) 강국이고 경제 규모로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면서요. 그런데 왜 소비자 보호에서는 이렇게 후진적인지 대통령과 국회의원에게 묻고 싶네요.”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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