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주 평범한 ‘박공지붕’ 주문에
각도에 변화 주며 조형미 연출 후
탄화목 외장ㆍ새하얀 내부로 강조
“작은 변화로 큰 임펙트 주려 했죠”
“집을 그려보세요”란 말에 삼각형을 먼저 그렸다고 해서 스스로의 상투성을 탓할 필요는 없다. 책을 펼쳐 거꾸로 엎은 형태의 박공지붕은 경사면을 통해 비를 흘려 보낸다는 지붕의 기능에 가장 충실한 형태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발생해오며 그 당위를 입증했다. 역사가 보증한 당위성 때문에 박공지붕은 건축가들이 선뜻 택하길 저어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박공지붕을 택한 건축가는 당위를 넘어 ‘뭔가’ 보여줘야 한다. 경북 예천의 시어하우스(shear house)는 그 뭔가에 대한 흥미로운 실험이다.
제사 때 수십 명 수용 가능한 거실
시작은 은퇴한 70대 부부의 별장 짓기였다. 평생 교사로 일한 두 사람은 몇 년 전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년을 맞았다. 부부는 서울과 고향인 예천을 오가며 머물 별장, 궁극적으로는 내려가 살 집을 생각하며 건축가를 찾았다. 임미정ㆍ이승택(stpmj건축사사무소)은 뉴욕에서 일하다가 한국에 온지 막 1년 된 부부 건축가였다. 시어하우스는 이들이 한국에서 맡은 첫 작업이다.
“요구 사항 중 좀 특이한 게 있었어요. 건축주가 문중의 장남이라 제사할 때 일가 친척들이 다 모일 수 있도록 거실이 넓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은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20~30명으로 줄었지만 한때는 90명 넘게 모인 적도 있다고 해요.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다 가깝고 먼 친척이라 제사하면 마을 주민들이 이 집으로 다 모이는 셈이죠.”
건축가는 집의 절반을 뚝 떼 거실에 할애했다. 긴 직사각형 집을 길이를 따라 반으로 나눈 뒤 남쪽엔 거실, 북쪽엔 방과 주방을 배치했다. 길쭉한 거실은 다시 두 구역으로 나뉜다. 한쪽은 TV와 소파가 갖춰진 휴식 공간으로서의 거실, 반대쪽은 긴 좌식테이블이 놓인 사교 공간으로서의 거실이다.
“거실에서 TV가 중심이 되면 보기 싫어도 계속 TV만 보게 되거든요. TV 볼 사람은 보고 얘기할 사람은 하고. 한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동시에 다른 활동을 할 수 있게 영역을 구분했습니다.”
사교 공간 쪽에는 남으로 전면창을 내 마을을 한 눈에 내려다 보게 했다. 창을 전부 열면 앞쪽 툇마루와 이어져 옛 한옥의 대청마루를 연상시킨다. 뒤쪽은 주방이다. 가족이 전부 모이는 날, 한쪽에서 차를 마시며 옹기종기 수다를 떠는 동안 다른 한쪽에선 TV를 보며 늘어지는 풍경이 예상된다.
집 안에서 펼쳐질 풍경은 소소하고 살갑겠지만, 현관에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각형, 직사각형, 사다리꼴 등 온갖 기하학 패턴이 빚어내는 거침없는 선과 면의 향연이다. 이게 다 박공지붕 때문이다.
슬쩍 비튼 박공지붕이 낳은 조형미
집 외관에 대해 건축주가 가지고 있는 그림은 거의 없었다. 유일한 주문은 “박공지붕으로 해달라”는 것. 은퇴한 부부가 노후를 보낼 집의 디자인으로 흔하디 흔한 박공지붕을 택했을 때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어떤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 둘 중 아마 후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집이든 삶이든, 아무것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은 적극적인 경우가 많지 않다. 건축가들은 작은 변화를 통해 아무것을 어떤 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박공지붕을 만들되 각도를 살짝 틀기로 한 것이다.
시어하우스 외관을 보면 직사각형 몸체에 박공지붕을 얹은 뒤 지붕 한쪽 끝을 손가락으로 슬쩍 민 모습이다. 아이디어는 사소했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사소하지 않았다. 외부에서 보면 밀려난 쪽의 지붕은 깊은 처마가, 밀어낸 쪽의 지붕엔 테라스가 만들어졌다. 지붕마루(지붕의 가장 높은 곳)가 사선으로 틀어지면서 내부엔 어긋맞긴 선들이 가득해졌다. 만나야 할 선들이 못 만나면서 빚어진 비정형의 도형들은 집안 곳곳에 묘한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건축가들은 내부를 하얗게 도장해 백색의 선과 면이 만드는 기하학적 풍경을 마음껏 강조했다. 에어컨, 냉장고, 심지어 세탁기가 들어가는 곳까지 문을 만들어 달아 가전제품을 최대한 가리고 집에 어울리는 가늘고 긴 조명을 세심하게 골랐다.
“약간의 트릭을 통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게 저희가 추구하는 건축의 한 형태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집을 의뢰할 때 건축주의 예산은 한정되게 마련인데, 건축가는 판에 박힌 집은 짓고 싶지 않죠. 그러다 보니 작은 변화로 큰 임팩트를 주는 방법에 대해 늘 고민하게 됩니다.”
도시를 벗어나 조용히 자연에 묻히고자 한 건축주의 마음은 외장재로 쓰인 나무 패널을 통해 실현됐다. 건축가들이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주변은 앞다퉈 자란 나무들로 빽빽했다. 이 소장은 “나무 외에 콘크리트나 메탈 등 다른 재료는 떠올릴 수 없었다”고 말한다. 외장에 쓰인 나무는 소나무 탄화목이다. 탄화목이란 원목을 특수고열처리를 통해 가공한 목재로, 뒤틀림이나 온도 변화에 강해 지붕에도 사용할 수 있다. 건축가는 이 탄화목을 지붕뿐 아니라 집 전체에 썼다. “몸체에는 일반 목재를 써도 돼요. 하지만 이 집이 한 덩어리의 나무처럼 보였으면 했습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고립된 나무요.”
하늘을 벨 듯이 예리한 오각형의 나무집은 근방의 농가주택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서울 한복판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어하우스는 ‘2016 김수근건축상 프리뷰상’을 수상한 데 이어 최근 ‘2016 젊은건축가상’에도 선정됐다. 임 소장은 시어하우스가 가진 약간의 다름을 관철시키느라 넘어야 했던 숱한 장애물들에 대해 회고했다. “지붕을 뒤트는 건 물론이고 재료를 나무로 하자고 했을 때도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쳤는지 몰라요. 춥다, 비 샌다, ‘하자’가 나오면 책임질 수 없다는 게 이유였죠.”
한국에 온 지 1년, 이들을 가장 아연하게 한 건 일상의 스트레스에 대한 사람들의 히스테릭한 반응이다. 집은 응당 한겨울에 반팔을 입을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해야 했고, 약간의 추위나 바람에도 어김없이 ‘하자’란 꼬리표가 달렸다. 수십 년 후 이 나라의 도시 풍경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도처에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긴장감이 팽배해요. 저는 이게 지금 한국의 건축을 획일화시키는 한 요인이 아닐까 합니다. 싸게, 빨리, 하자 없이 지으려면 나올 수 있는 건물은 한계가 있거든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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