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나와라 뚝딱 금메달이 되고, 올림픽 생각대로 하면 되고”
정말 그랬던 때가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 열기가 뜨겁던 2008년 여름, TV만 틀었다 하면 나왔던 이 광고 영상 속 CM송 가사는 제대로 들어맞았다. 박태환(27)은 그해 8월 10일 중국 베이징의 국가아쿠아틱센터에서 열린 남자 자유형 400m 결승에서 3분 41초 86의 아시아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더니 자유형 200m에서 은메달까지 따냈다.
그는 한국 체육사에 길이 빛날 이정표가 된 이 성과 덕분에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로 우뚝 섰다. 당시 19세였던 그의 주가는 이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었다. 의류업계, 통신업체, 금융권 가릴 것 없이 그를 광고섭외 1순위로 꼽았고 동네 수영장마다 ‘박태환 키즈’들이 넘쳐났다. 그야말로 ‘박태환 신드롬’이었다.
그 어려운 것을 해 낸 박태환
국민들이 그만큼 박태환을 사랑했던 것은 단순히 젊고 잘생긴 청년이 금메달까지 따서 기쁘게 해줬기 때문이 아니다. 불가능으로 여겼던 일을 현실로 만든 성과에 대한 경의와 애정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수영 선수가 세계 무대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족한 기본 환경이나 선수 육성 시스템을 굳이 꼽지 않아도 신체조건부터 서양의 유명 선수들에 비해 많이 불리했다. 한 수영강사는 “박태환은 해외 선수들보다 신체 조건이 상당히 불리한 편”이라며 “다리가 짧고 발이 커야 유리한데 박태환은 다리는 길면서 발은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태환의 발 크기는 290mm. 경쟁상대였던 호주의 그랜트 해켓(360mm)과 이언 소프(350mm), 중국의 쑨양(360mm),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350mm)보다 많이 작다. 우리 수영선수들은 이 때문에 “박태환이 올림픽에서 조그만 오리발을 하나씩 더 낀 선수들과 싸웠다”고 표현했다.
여기에 박태환은 다른 선수들과 달리 트라우마에 가까운 잊지 못할 아픈 기억마저 갖고 있다. 4세때 천식 치료를 위해 처음 수영장을 찾았던 그는 중학생 시절 올림픽에 처음 나갔다. 2004년 대청중학교 3학년이었던 그는 태극마크를 달고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했는데 어린 나이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시작도 하기 전에 혼자 물 속에 빠졌다가 실격 당했다.
당시 유일한 실격 선수였던 그는 2011년 2월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렇게 떠올렸다.“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TV에서만 보던 이안 소프나 마이클 펠프스 같은 선수들이 옆에 있는데 꿈인가 싶어 뺨을 때리기도 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소개 때 인사도 못했다. 결국 긴장한 나머지 몸이 얼음처럼 굳어 출발선상에서 고꾸라졌다.”
10년 물길 대장정, 영웅이 된 마린보이
박태환은 그 때의 충격을 2006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이라는 위업을 세우며 극복했다. 자유형 200m와 400m, 1500m를 석권하며 한국 수영 영웅의 탄생을 알린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폭풍 성장했다. 2년 뒤 베이징올림픽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로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후 그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100m와 200m, 400m 종목서 모두 정상에 오르며 두 번에 걸친 아시안게임 연속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자유형 400m 예선 때 실격 판정 번복 등 위기를 겪었지만 결선에서 중국의 쑨양 선수에 이어 두 번째로 터치패드를 찍으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후원사들의 잇단 계약 포기와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 등이 맞물리며 잠시 시련을 맞기도 했다. 하지만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호주에서 열린 팬퍼시픽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에서 4분 43초 15로 시즌 세계 1위 기록을 달성해 기대감을 높였다.
아쉬운 것은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박태환수영장’에서 열린 인천아시안게임에서는 한 개의 금메달도 목에 걸지 못한 점이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를 패배자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았다. 대회에서 1개의 은메달과 5개의 동메달 등 6개의 메달을 목에 건 그는 아시안게임에서만 통산 20개의 메달을 따낸 ‘한국 수영의 전설’이었기 때문이다. ([100℃ 인터뷰] 박태환 "박수 받으며 떠날 것")
‘네비도’ 흙탕물 헤엄친 지난 2년
그런 박태환에게 닥친 최대의 시련은 ‘네비도 파문’이다. 박태환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직후 받은 도핑 검사에서 금지약물인 테스토스테론 양성 반응이 나온 것이다.
인천아시안게임을 1개월여 앞둔 2014년 7월 말 박태환은 평소 다니던 T병원에서 남성 갱년기 치료제로 많이 쓰이는 네비도 주사를 맞았다. 박태환이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맞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법정 공방 끝에 주사를 놓았던 의사 김모씨의 벌금형으로 고의 투약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박태환은 도핑 문제에 엄격하게 ‘무관용 원칙’을 내세우는 국제수영연맹(FINA)의 징계를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8개월 동안 선수 자격 정지와 인천아시안게임 메달 박탈이라는 징계를 당했다. 그의 징계는 지난 3월2일 끝났다. 그동안 그는 개인 훈련으로 컨디션과 기량을 유지해 왔다.
족쇄가 풀린 박태환은 4월 말 리우올림픽 국가대표 2차 선발전을 겸한 동아시아 대회에 참가해 4개 종목에서 우승했다. 이 때 FINA가 정한 기록 기준을 모두 넘겨 4개 종목의 리우 올림픽 출전 자격까지 획득했다.
그러나 대한체육회는 박태환을 국가대표로 선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한체육회는 ‘경기단체에서 도핑 위반으로 징계받은 선수는 해제일로부터 3년 동안 국가대표로 선발될 수 없다’는 내부 규정을 근거로 내세웠다.
박태환의 ‘깨진 거울’ 마지막 조각
이미 FINA 징계를 모두 마친 박태환은 3년 동안 또 대표 선발을 금지하는 것은 이중처벌이라며 대한체육회와 맞섰다. 그는 지난 4월 26일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중재를 신청했다. 이후 대한수영연맹관리위원회는 5월 실시한 경영대표 선발에서 그를 제외됐다.
결국 박태환은 마지막 수단으로 법의 힘을 빌렸다. CAS 제소와 별도로 지난달 23일 서울동부지방법원에 리우올림픽 출전 자격 판단에 관한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에 대해 서울동부지방법원은 지난 1일 “수영 국가대표 선발규정에 의한 결격 사유가 존재하지 아니한다”며 박태환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대한체육회는 4일 CAS 잠정 처분 결과가 나오는 대로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기로 약속했다. 마침내 지난 8일 CAS 마저 “박태환은 한국 수영 국가대표 자격이 있다”고 판결하면서 그의 힘든 싸움을 끝낼 수 있도록 했다. (관련기사▶박태환, 결국 리우 간다)
이를 통해 박태환은 자유형 100m·200m·400m·1,500m 네 종목에서 리우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했다. 메달을 노려볼 만한 종목은 자유형 400m다. ‘생각대로 하면 되던’ 시절은 지났지만 금빛은 아니더라도 메달을 다퉈볼 만한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관련기사▶ 박태환 “좋은 색깔 메달 기대”)
박태환의 지난한 싸움은 깨진 거울을 다시 붙이는 과정과 비슷하다. 깨진 거울을 붙이다 보면 손에 상처를 입고 거울 표면에 금이 남기 마련이다. 그러나 붙이지 않으면 그저 부서진 유리조각으로 끝날 뿐이다. 박태환이 체육회와 맞서면서 리우행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것은 상처를 받고 흔적이 남아도 다시 온전한 거울로 서고 싶어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 다시 만드는 거울의 마지막 조각인 리우올림픽이 다가오고 있다. 과연 얼마나 금이 남을 지, 그런 거울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 지는 모두 박태환의 노력에 달렸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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