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뇌물천하였다. 왕족ㆍ정승부터 최하급 관리인 아전까지 경쟁적으로 뇌물을 챙겼다. 곤장 치는 나장에게 뇌물을 주면 곤장 강도가 약해졌고 옥졸에게 돈을 주면 시체로 위장해 풀어줬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뇌물사건만 3,000여 건. 그 시작은 태조4년(1395년) 참형(斬刑)을 당한 노을생(盧乙生) 사건이다. 그는 임금의 교지에 있던 이름을 긁어낸 뒤 다름 사람 이름을 써넣어 주고 뇌물을 받았다. 공문서를 위조한 것이다. 그러나 곧 발각돼 자신은 목을 베이고 뇌물을 준 이는 곤장을 맞았다.
▦ 조선은 뇌물죄를 중히 여겼다. 한 관(3.75㎏)의 뇌물을 받으면 작은 매로 볼기를 치는 태형 70대, 55관(206㎏)을 받으면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장형 100대에 3,000리 유배, 80관(300㎏) 이상이면 사형에 처했다. 중노동을 시키는 도형(徒刑)과 얼굴이나 팔에 먹물로 죄명을 새겨 넣는 자자형(刺字刑)도 있었다. 뇌물 받은 관리를 추방하고 그 자손까지 연좌제를 적용해 과거를 못 보게 하는 법도 만들었다. 그러나 임금의 총애를 받는 대신은 불문에 부치는 등 형평성을 잃다 보니 뇌물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 홍콩은 ‘관시(關系)’ 관습 탓에 오랜 기간 부패가 횡행했다. 1974년 염정공서(廉政公署)를 만들어 뇌물사범에 대해 영장 없이 체포와 가택수색을 하는 조치에 들어갔다. 공무원 월급도 대폭 올렸다. 이후 공직사회가 깨끗해졌다. 청나라 옹정제가 만든 양렴은(養廉銀)이라는 특별보상제도 또한 효과가 있었다. 양렴은은 ‘염치를 기르는 돈’이라는 뜻으로, 봉급 외 관리 행실에 따라 지급하는 특별수당이었다. 청렴하고 성실한 관리는 봉급의 몇 배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받았기 때문에 뇌물비리가 크게 줄었다.
▦ 사회정의의 보루여야 할 차관급 검사가 큰 도둑으로 드러났다. 그는 돈과 고급승용차를 거저 받긴 했으나 대가성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연 없는 뇌물이 어디 있으랴. 검찰도 대가성을 인정해 뇌물죄를 적용했다. 성호 이익은 “뇌물이 자행되는 것은 법이 해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가성이 없어도 뇌물을 다스리는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사회가 깨끗해지려나. 권력이 분산되면 로비나 청탁이 쉽지 않다. 반면 소수에게 막강한 권력이 집중된 사회에선 뇌물이 사라지기 어렵다. 검찰 개혁이 절실한 이유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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