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생전에 퇴위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전 일본 열도가 충격에 빠졌다. 왕실에 대한 애착이 각별한 일본인들은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며 걱정과 놀라움에 빠져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14일 몽골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참석차 출국하기에 앞서 하네다공항에서 “여러 보도가 있는 것은 알고 있다”며 “사안의 성격상 언급을 피하겠다”고만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언급을 피하겠다”고 일왕 문제를 입에 담지 않았다. 국정운영과는 구별되는 존재인 일왕의 성격상 총리와 정부대변인이 나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에겐 최대 화제였다. 13일 밤 NHK를 통해 소식이 알려지면서 거리 곳곳의 TV스크린 앞에 모여든 일부 인파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14일에도 주요방송들은 일왕의 소식을 수시로 내보냈고 각 신문은 1면에 일왕의 거취를 대서특필했다. 도쿄 치요다구 오테마치의 왕궁 근처에 모여든 시민들중엔 “퇴위 여부는 국민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일왕께서 중단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왕실과 인연이 깊은 교도(京都) 시민들은 “생전에 퇴위한다니 그런 일이 가능한가”“오히려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좋은 시기”라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우익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지사는 “그동안 재해지역 위문으로 상당히 피곤했다는 것은 알지만 좀더 노력해주었으면 좋겠다”며 “일본사회에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고 아쉬워했다.
일왕은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각종 행사 참석과 외국국빈 의전 활동을 왕성하게 해왔다. 69세이던 2003년 전립선암, 78세였던 2012년 심장 관상동맥 우회 수술을 받았지만 재활과 테니스로 건강을 유지해왔다. 그러다 지난해 8월15일 전국 전몰자추도식에서 묵념과 말씀 읽기의 순서를 헷갈리고 이미 진행된 프로그램을 다시 물어보면서 건강이상설이 알려지게 됐다.
무리한 일정이 화를 키웠다며 일본 정부를 성토하는 기류도 나오고 있다. 실제 일본 정부 궁내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해 동안 헌법에 정해진 국사행위로 내각에서 서류날인이나 서명이 1,000여건, 신임 외국대사로부터 인사를 받은 신임장 의정행사가 26회에 달했다. 올해는 구마모토 지진현장을 방문해 무릎을 꿇고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실제 양위가 이뤄질 경우 장남인 나루히토(德仁ㆍ56)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지만 일본의 달력인 ‘연호’를 바꿔야 하는 등 사회적 파장은 적지 않다. 왕실제도를 정한 ‘황실전범’부터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일단 황실전범 개정팀을 물밑에서 가동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7년 5월 시행된 이 법에는 일왕의 생전퇴위에 관한 규정 자체가 없다. 2005년 고이즈미 전 총리 당시 왕위의 안정적 상속을 목적으로 한 자문회의가 구성돼 남녀가 아닌 장자를 우선한다는 보고서를 냈지만 지금까지 결론은 미뤄져 왔다. 현재 일왕의 차남만 아들이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이번 기회 왕위계승 조건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아키히토 일왕이 일본 국민의 존경을 받는 것은 소탈한 풍모뿐 아니라 일생동안 지속해온 평화행보도 한 몫하고 있다. 전후 50년, 60년, 70년 등 10년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물론 사이판과 팔라우 등 해외 ‘위령 여행’을 다녀오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나선 군인들의 추모하는 것이지만 상대국 희생자 위령비에도 참배를 하고 있다.
특히 2005년 사이판의 한국인 전몰자 위령지인 한국평화기념탑에 참배하고 2007년, 도쿄의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 사망한 고(故) 이수현씨를 소재로 만든 영화를 관람하는 등 한국에 상당한 관심을 표해왔다. 2001년 12월 생일 회견 때는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쓰여 있는 데 대해 한국과의 연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당시 일본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작년 8월15일 “지난번 대전(大戰ㆍ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을 거론하는 등 근년들어 전쟁에 대한 성찰을 강조해 아베 정권의 우경화 행보를 견제하는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때문에 일본 평화진영에겐 ‘호헌’의 상징적 버팀목이 퇴장하는 의미가 있어 아베 정권의 독주가 심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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