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8년 전. 칸트의 ‘판단력 비판’ 강독 시간이었다. 졸며 깨며 간신히 한 줄 한 줄 따라가는데,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온 교수가 잡담처럼 말했다. “독일에서는 대학교수와 청소부의 임금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청소부들이 일 마치고 돌아와 자기 전에 읽는 책이 칸트예요.” 잠이 번쩍 깨며 가슴 속에 뭔가 축축하고 뜨듯한 것이 번졌다. ‘이건 뭐지? 너무 아름답잖아.’ 졸고 있는 학생들이 한심해 날조한 허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칸트는 그저 노동 이후의 쉼을 가리키는 메타포일 뿐, 무협지면 어떻고, 포켓몬 고면 또 어떤가. 칸트 미학 같은 건 다 잊어버렸지만, 그 순간 나는 인생의 미학을 얻었다. 수직적 격차 대신 수평적 다양성이 지배하는 사회. 능력주의(Meritocracy)가 청소노동과 지식연구 사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직종 내부에서 관철되는 세상. 유능한 청소노동자와 똑똑한 대학교수가 경합해야 할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징글징글한 메리토크라시의 추종자들이 사는 나라다. 그런데 직업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기까지의 투입만 능력이고, 직업 수행의 과정에서 투입되는 노고는 능력이 아니다. 직업이라는 것 자체를 막대한 자원 투입에 대한 최종적 산출로 받아들이니 변호사가 9급 공무원에 지원하는 게 깜짝 놀랄 뉴스가 된다. 빠른 시간 안에 능숙하게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고치거나 전봇대에 올라 노후된 2만2,900볼트 고압선을 교체하는 것. 이런 일은 능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과연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래도 99%는 심하지.”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망언을 향한 국민적 분노의 와중에 모씨가 말했다. “뭐야, 그러니까 민중의 50%는 개돼지라고 말했으면 파면까지는 안 갔을 텐데, 99%라고 해서 분노한 거야? 50%라고 했으면 나는 포함 안 된다고 생각했을 텐데 빼도 박도 못하게 99%라고 해서 화내는 거야?” 개돼지가 아니라 숫자가 문제였다는 혐의는 점심을 함께 하던 대선배의 한 마디로 모종의 확신에까지 이르게 됐다. 족보 매매로 인구의 80%가 양반이 된 조선 후기를 언급하며 “김, 이, 박 세 성씨는 족보를 돈 주고 샀을 가능성이 높다”는 농담이었다. 갑오경장의 노비제 혁파는 만인평등 사상의 대두가 아니라 전 국민의 양반화 때문이었지. 신분제를 타파하기보다 나만 양반이 되면 그만인 건 전통이자 문화였던가.
개 돼지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우중(愚衆)이라는 완곡한 원관념으로 바꾸고 보면 분노의 핵심은 실상 거기가 아니다. 이 거대한 분노가 명중해야 하는 곳은 구의역의 청년을 두고 “그게 어떻게 내 자식처럼 생각되나. 위선이다”고 말한 파렴치와 패륜이다. 공감의 장치로서의 ‘내 자식 프레임’은 이제 폐기하는 게 좋겠다. “내 새끼는 공부 열심히 시켜 그런 일 안 하게 해야지”라는 답답한 결론을 이길 수가 없어서다. 스크린도어를 고치는 고된 노동에서 재미와 보람을 느끼고, 그렇게 번 적잖은 돈으로 도란도란 아이를 키우며, 주말이면 놀이공원에 가고, 아이들을 재운 후엔 만화책을 읽으며 키득키득 웃는 삶. 1%를 향해 내 삶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어디 돈이 전부겠냐고 말할 수 있는 세상. 금수저가 못될 바에야 낳지도 말아야 한다고 절망하기보다 내 새끼든 남의 새끼든 이런 인간답지 못한 삶은 용납할 수 없다고, 99%여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뜨겁게 외쳐야 이 끔찍한 시스템에 실낱 같은 균열이라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공무원 한 명 파면시킨다고 세상이 좋아질 리 없다. 1%가 되려는 욕망이 훨훨 불타고 있는 한, 그래도 10%안엔 들지 않을까 안위하며 권력의 백분위율을 재고 있는 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99%인 나의 한 표가 무려 재벌 총수의 한 표와 등가가치를 갖는다는 게 새삼 경이롭다. 아직은 민주주의 공화국. 선거는 멀었지만, 당신도 한 표, 나도 한 표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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