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공유(37)가 또 하나의 인생작을 만났다. 한결 같은 꾸준함으로 평균 이상의 성과를 냈던 그이지만 이번엔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피다 어느 한 작품에서 눈길이 멈춘다면 아마도 이 영화일 확률이 높다.
공유가 올라탄 ‘부산행’ KTX는 이제 막 출발역을 떠난 참이다. 벌써부터 가속도가 붙고 있다. 공유의 쾌속 질주도 본궤도에 올라섰다. 지난 5월 칸영화제에서 들려온 입소문의 실체는 기대 이상이었다.
영화 ‘부산행’은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열차 안에서 생존을 위해 사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공유는 별거 중인 아내를 만나러 딸 수안(김수안)과 함께 부산행 열차에 올랐다가 좀비들의 공격으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맞서는 펀드매니저 석우를 연기한다. 영화는 재난 상황의 혼돈을 그려내고, 공유는 혼돈의 한가운데서 침착하게 무게중심을 잡는다. 현실에 발을 디딘 공유의 연기가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한다. ‘부산행’이 오락영화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메시지까지 획득할 수 있었던 데는 공유의 존재감의 큰 역할을 했다. 공유가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영화가 칸에서 처음 공개됐고 이제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기분이 어떤가.
“긴장과 피로가 겹쳐서 편도염이 왔다. 12일 언론시사회를 한 뒤에 조금 편해졌다. 관객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궁금하다. 시사회 때 해외 관객과 국내 관객의 정서 차이를 확실히 느꼈다. 칸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는 장면에서 박수와 환호가 터졌는데 국내 관객은 감성적인 장면에 더 몰입하는 것 같다. 굉장히 흥미로웠다.”
-해외 영화제 방문이 처음인데도 그 누구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괜히 기죽고 싶지 않아서 연기한 거다. 사실 시차적응도 안 돼서 경황이 없었고 내심 떨리기도 했다. 외국 배우들 앞에서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능숙한 척했다. 내가 조금 촌스러운 구석이 있다(웃음).”
-마동석, 정유미, 최우식 등 출연배우들과 연기 호흡은 어땠나.
“원래 친분이 있던 동료들이기도 하지만 정말 서로 잘 맞았다. 덕분에 촬영장이 즐거웠다. 영화 내용은 무거운데 현장이 이렇게 밝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딸을 안고 뛰고 액션 연기도 했는데 다치진 않았나.
“아이를 안고 뛰다가 혹시 넘어져서 아이가 다칠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계단을 뛰어내려오는 장면을 찍다가 허리를 좀 다치긴 했다. 그런데 나보다는 마동석 형이 더 다쳤다. 워낙 고난도 액션이 많았다. 이번 기회에 동석이 형에게 몸 생각 좀 하라고 말하고 싶다. 최근에 드라마 찍다가 무릎을 다쳐서 절뚝거리더라. 하도 다치니까 이젠 병원 전문가가 다 됐다. 내가 어디 아프다고 말만 하면 바로 전문의를 소개해준다. 며칠 전에도 동석이 형이 추천해서 비타민 주사를 맞고 왔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선물로 5회 이용권을 결제해주고 왔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사이비’로 호평 받은 연상호 감독의 첫 번째 실사영화다. 현장 연출에서 다른 감독들과 어떤 점이 달랐나.
“감독님은 한 장면을 여러 번 찍지 않는다. 촬영 일정도 짧았다. 다음 회차 촬영을 당겨서 찍는 건 처음 경험해봤다. 촬영이 쉽게 쉽게 진행되니까 배우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이래도 괜찮나’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현장 편집본을 보니 믿어도 되겠더라. 그때부턴 노파심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감독님은 굉장히 명쾌하고 자신감이 있는 분이다.”
-좀비 소재가 과연 통할까 걱정스럽지는 않았나.
“솔직히 걱정이 안 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성공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참여한 것도 아니다. 흥미로운 기획이라 끌렸다. 지금 제안 받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한번 두드려보자는 마음이었다.”
-좀비 무리가 살벌하게 달려들던데 촬영하다가 무섭기도 했겠다.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놀이공원에 가서도 ‘귀신의 집’엔 얼씬도 못한다. 극중 좀비들이 분장인 걸 아는데도 무섭더라. 좀비들에게서 도망치다가 잡힌 적도 있다(웃음). 한번은 좀비 역 배우들이 ‘컷’ 소리를 못 듣고 끝까지 연기하면서 내게 달려드는데 나도 모르게 잔뜩 겁을 먹었다. 메이킹 필름에 우스꽝스럽게 찍혔을 텐데 큰일이다(웃음). 촬영하면서 좀비 역 배우들에게 진짜 감명 받았다. 영화 안에서 금세 스쳐 지나가고 분장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기도 어려울 텐데 굉장히 집중해서 연기를 하는 거다. 역할의 크고 작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반성을 많이 했고 자극도 받았다. (좀비로)특별출연한 심은경씨에게도 감사하다.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은데도 다른 배우들과 똑같이 트레이닝을 다 받고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다고 들었다. 좀비의 비주얼이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줬다.”
-단역 배우들을 보면서 자기반성을 했다는 건 이 영화에서 자신의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뜻인가.
“석우는 영화 안에서 유일하게 변화하는 인물이다. 입체적인 연기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겸손이 아니라 진심이다. 감독님이 촬영을 여러 번 가지 않았는데, 내가 좀 더 물고 늘어졌어야 했던 건 아닐까 후회가 되기도 한다. 아낌없이 나를 내던졌다고 말하기엔 좀 부끄럽다.”
-영화 속 재난 상황이 실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많이 떠올리게 하는데, 연기를 하면서 더 실감했을 것 같다.
“한창 촬영하던 중에 메르스 사태가 터졌다. 성질은 다르지만 같은 바이러스 아닌가. 실제 현실이 벌어진 가운데 재난 영화를 찍고 있는 셈이니 기분이 묘했다. 메르스가 전국으로 퍼지면서 우리도 심각해졌다. 부산에서 합숙하면서 촬영했는데, 서울에 갈 일이 있어도 웬만하면 가지 말라며 붙잡고 말렸다. 혹여 바이러스에 감염돼 오면 현장의 모든 스태프가 위험해지니까. 당시 숙소가 해운대에 있었다. 그런데 해운대에서 부산 지역의 첫 번째 감염자가 나왔다. 그때 진짜 겁먹었다. 스태프들이 마스크 쓰고 촬영했다. 만약 배우가 메르스에 걸렸더라면 아마 ‘부산행’ 개봉 못했을 거다.”
-실제 상황과 겹쳐서 더 실감나는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영향이 없진 않았을 거다(웃음).”
-올해 첫 1,000만 영화로 벌써 거론되고 있는데 욕심나지 않나.
“음… 사실 잘 모르겠다. 한번도 그 스코어를 상상해본 적이 없다. 항상 내 목표는 손익분기점을 넘는 거다. 솔직하게 숫자로 말하면 500만이다. ‘용의자’나 ‘도가니’나 500만 문턱을 넘지 못하고 멈췄다. 딱 500만 관객만 돼도 좋겠다.”
-아직 미혼인데 부성애를 연기하는 게 어렵지 않았나.
“크게 부담되지 않았다. 연기는 상대적이다. 극중 딸로 나온 수안이가 연기를 잘하니까 나도 자연스럽게 아빠의 마음이 됐던 것 같다. 외모가 닮았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다. 촬영을 하면서 닮아간 것일 수도 있다. 처음 시나리오상에 설정된 아들을 딸로 바꿀 만큼 수안이가 가진 매력이 컸다. 아역 배우들은 아무래도 체력 때문에 어른들보다 쉽게 지칠 수밖에 없는데 수안이는 어른처럼 버티고 있더라. 그게 신기하고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촬영장에선 많이 챙겨주지 못했다. 일부러 거리감을 두려고 했다. 영화에서 서먹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카메라 밖에서 살갑게 어울리면 연기할 때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런데 수안이가 어느 인터뷰에선가 ‘아빠가 좀 소심한 것 같다’고 말하더라(웃음).”
-언젠가는 결혼도 하고 아빠도 될 텐데 사전 연습이 됐겠다.
“내가 정말 아빠이고 유부남이었다면 연기를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실제와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결혼과 육아 같은 인생의 경험들이 연기할 때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막연한 두려움도 생긴다. 가정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알게 돼서 그런 것 같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알면 알수록 어려워진다. 어릴 때는 경험이 쌓이면 연기도 더 풍성해질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그만큼 두려움도 커지더라. 내 지난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 미래에 대한 욕심, 사람들의 시선과 책임감 때문인 것 같다.”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엔 자신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연말에 방송되는 김은숙 작가의 신작 드라마 ‘도깨비’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뭔가?
“사실 여전히 로맨틱코미디가 두렵다.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구구절절 털어놓을 수는 없지만,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냈다는 정도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망치지 않고 부닥치기로 했다. 영화와 드라마는 장르적 속성도 다르고 촬영 환경도 다르다. 배우의 호흡도 당연히 달라야 한다. 나는 느리고 깊게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 영화를 선호했다. 그런데 영화를 줄기차게 하다 보니 지치기도 하고 연기적으로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내가 매너리즘에 빠져 너무 안이하진 않았나 돌아보게 됐고,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절한 시기에 자기반성을 하게 된 셈이다. 영화는 캐릭터별로 호흡이 분리되는 반면 드라마는 주인공에 집중되지 않나. 다른 호흡으로 스스로를 몰아칠 필요가 있다고 봤다. 그러면 자신감도 되찾을 수 있고 동기부여도 되지 않겠나 싶었다.”
-송강호와 함께 출연한 영화 ‘밀정’은 개봉 준비 잘 돼가나.
“시대극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출연한 영화다. 최근 후시녹음을 하고 왔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내가 등장하는 장면만 살짝 봤는데, 아주 멋있게 나왔다.(웃음)”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