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건 몰라도 집안의 정신이 담긴 고문서가 귀하다는 건 알았지.”
제2회 한국고문헌 명가의 날에 고문헌 명가 종부로 선정돼 14일 경기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이하 한중연)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진주 류씨 경성당 종택 종부 권보남(82)씨는 “가문의 소중한 가보 ‘고행록’이 고문서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다”며 이렇게 말했다.
‘고행록’은 1718년 숙종 때 정1품 보국숭록대부에 올랐던 류명천의 부인 한산 이씨(1659~1727)가 예순에 한글로 쓴 회고록이다. 한산 이씨는 18세에 정3품 숙부인, 22세에 정2품 정부인, 33세에 정1품 정경부인에 이르렀으나 정치적 환국에 휘말린 남편을 따라 유배소를 떠돌며 험난한 삶을 살았다. ‘고행록’에는 세 차례나 아이를 잃고 양자를 들였으나 며느리마저 둘이나 잃어야 했던 한산 이씨의 기구한 운명이 쓰여 있다.
‘고행록’은 한중연이 한글 반포 570돌을 맞아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연구원 내 장서각에서 여는 특별전 ‘한글, 소통과 배려의 문자’에 전시된다. 2003년 종가에서 보존하고 있는 고문서 1,616점을 한중연에 기탁했던 권씨는 이번 전시를 위해 ‘고행록’ 원본을 잠시 맡겼다. 김학수 한중연 고문헌연구실장은 “17, 18세기 한글 어문학 연구에 큰 의미가 있는 자료”라며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여성들이 어떻게 고난을 극복했는지 이 문헌을 통해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고문헌 명가의 날’은 한중연의 연구를 위해 중요 고문서와 고서를 기증ㆍ기탁한 문중 관계자 120여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마련했다. 이날 행사는 고문서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주체가 권보남씨 같은 종부였다는 사실을 주제로 삼았다. 한중연이 고문헌 명가로부터 기증ㆍ기탁받은 자료는 수만 점에 이른다.
‘고행록’은 진주 류씨 경성당 종가 종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저술이다. 50여년 전 경기도의 대표적 남인 가문인 진주 류씨 경성당 종가에 시집온 권씨는 “결혼하고 며칠 뒤 가문의 전통에 따라 시어머니가 ‘고행록’을 읽게 했다”며 “처음에는 옛날 어투여서 읽기도 어려웠고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맏며느리로서 현명하게 가문을 지키라는 의미로 읽게 하셨다는 걸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권씨가 읽었던 것은 시어머니가 자신의 시할아버지가 읽은 것을 받아 쓴 전사본이다.
권씨는 ‘고행록’을 비롯해 가문이 보유하고 있던 고문헌을 보존하는 데도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그는 “박스에 쌓여 먼지에 덮여 있던 문헌들을 한 장 한 장 펴서 보관했다”며 “매년 여름이면 문헌들이 훼손되지 않도록 장마가 끝난 뒤 바람을 쐬게 하는 것도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권씨는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간수하는 것도 ‘고행’이었다”며 웃었다.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 등 100여종의 한글 자료를 소개하는 이번 전시에는 ‘고행록’을 비롯해 민간이 제공한 귀한 자료를 여럿 만나볼 수 있다. 권씨는 “기록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기록을 후대에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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