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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이름은, 무겁다

입력
2016.07.1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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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한국 소설의 필독 목록에 오르는지 모르겠지만 고전이라 할 작품 중에 벽초 홍명희가 쓴 단 하나의 작품인 ‘임꺽정’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십여 년 동안 신문에 연재한 대하소설인데 당시에도 걸작으로 평가받았건만 정작 우리는 읽을 기회가 없었다. 벽초가 해방공간에서 월북한 까닭이었다. 80년대 후반에 해금되어 책이 출판된 후 나 역시 소설의 재미에 빠져 밤을 새워 읽었다.

재미와 함께 큰 충격을 받은 것은 가끔 등장하는 천민들의 이름이었다. 부지깽이니, 개구멍받이니 같은 단어가 사람 이름으로 불렸을 때 그것은 놀라움을 넘어 비애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이름들은 그들이 처한 처참한 상황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단어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별명이 아닌 본명으로 평생 부지깽이라 불리는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 것인가. 부지깽이는 아궁이에 불을 땔 때 불을 헤집는 막대기다. 한쪽이 불에 타 검댕이 되었다가 점점 짧아지면 그냥 아궁이 속으로 던져지는 존재, 그것을 사람의 이름으로 부르는 사회가 바로 봉건 조선이었다. 가난으로 버림받았거나 외거 노비가 낳은 어린아이를 집으로 들이게 되면 붙이는 이름이 개구멍받이였다. 대문이 아닌 개가 드나드는 구멍으로 들어온 아이라는 의미이고 그것 또한 평생의 이름이 되었다.

봉건시대에 하층민은 이름이 없었다. 부르기 편하고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붙이는 ‘아무개’일 뿐이었다. 실제로 그 아무개는 농기구나 가축을 빗댄 이름이 많았다. 그저 ‘말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이름이 없는데 성이 있을 리 없다. 오늘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성씨와 이름이 보편적으로 퍼진 것은 놀라울 정도로 최근이다. 갑오경장이 있던 1894년에도 성을 가진 사람이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니까 임꺽정이 살던 명종 조에는 실로 90% 이상의 백성이 이름도 성도 없이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임란 이후 실로 눈물겨운 정명(定名)투쟁, 곧 이름을 얻기 위한 긴긴 싸움이 벌어진다.

우리 역사에서 글쟁이들이 제일 호황을 누렸던 시기가 18세기였다. 일설에 의하면 1,000여 명의 전문 작가들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맹렬히 활동하며 고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그들이 남긴 작품은 소중하게 다루어져 지금껏 어마어마한 양으로 남아있으니 다름 아닌 족보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족보는 이들 작가가 창작한 것인데 얼마나 눈부신 상상력과 기교를 보여주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위서와 가짜 편지, 거짓 탁본 등등으로 증거를 워낙 촘촘하게 맞추어 놓아서 지금도 반박이 불가할 정도로 완벽한 족보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전문작가단이 만들어놓은 가짜 증거들은 텔레비전의 사극 따위에 버젓이 들어가곤 한다. 하긴 그들이 꾸며낸 두문동 칠십 인인가, 팔십 인인가 하는 고려 말의 충신 이야기에 영조대왕조차 깜빡 속아서 제사까지 지내준 적이 있었다.

나는 우리가 가진 족보니 성씨니 하는 게 모두 위조라는 고발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위조를 두둔하고 싶다. 봉건 사회에서 이름이라도 갖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 그 자체가 어쩌면 가장 무거운 선대의 삶이었음에 숙연한 것이다. 실제로 가난한 집에서도 작가를 들여 보통 일 년씩 먹이고 재우며 논밭을 팔아 비로소 족보를 얻는 경우가 흔했다. 그리고 봉건이 무너지고 모든 사람이 신분제의 철쇄를 벗어났다. 모든 인간은 개인으로 호명되었고 이름은 곧 개별 자아의 상징이 되었다. 조직화한 공장이나 군대에서 이름 이외의 칭호로 불릴 때 거부감이 일고 ‘나는 누구다’라고 이름을 밝히는 게 당당한 시대가 되었다. 부정할 수 없는 근대의 성취인 것이다.

어느 고위 관료가 신분제 운운하며 민중을 개돼지라는, 봉건 시대의 통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가 모독한 것은 당대의 민중뿐 아니라 조상의 눈물과 근대의 발자국, 우리 모두의 이름이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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