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도연이 8일과 9일 1, 2회 방송을 내보낸 tvN 금토드라마 ‘굿와이프’로 11년 만에 시청자를 만났다. 방송 이후 최고의 화제는 단연 전도연의 명연기였다. 비리를 저지른 검사 남편(유지태)을 대신해 생업 전선에 뛰어든 변호사 김혜경 역을 맡은 전도연은 수임한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 사이사이에 경력단절 여성의 애환과 의혹투성이 남편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탁월한 연기로 그려내 시청자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그야말로 ‘클래스’가 다른 연기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전도연을 호평하는 게시물로 도배됐다. ‘굿와이프’에 출연하며 “대중에 가까워지고 싶었다”고 했던 전도연은 그 바람을 방송 첫 주에 이뤘다. 나아가 ‘굿와이프’로 인해 전도연이란 배우의 가치도 재조명되고 있다. 전도연은 광고와 방송에서 연기를 시작했으나 영화에서 실력을 다졌다. 전도연의 명불허전 연기를 TV 화면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 오늘의 전도연을 만든 영화를 꼽아봤다.
접속(1997)
PC통신을 매개로 교감하는 두 남녀의 애틋한 로맨스를 그린 영화. 옆자리에 앉아서도 모바일 메신저로 대화하는 요즘 시대에 영화 ‘접속’의 PC통신 러브스토리가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1997년 개봉 당시엔 신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과 감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주목 받았다. 영화 개봉 이후 PC통신이 유행했고, 주제곡 ‘러버스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가 수록된 OST 앨범도 불티나게 팔렸다. 주로 TV드라마에 출연하던 전도연은 이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해 배우 인생 전환점을 맞았다. 친구 애인을 짝사랑하며 가슴앓이 하는 수현 역을 안정감 있게 소화해낸 전도연은 배우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하며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 그 해 열린 영화 시상식의 신인상을 싹쓸이했다. 이후 전도연은 영화로 차츰 무게중심을 옮겨갔고, 자신만의 독보적인 필모그래피를 쌓으며 한국영화 대표 여배우로 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접속’은 오늘날의 전도연이 존재할 수 있게 한 밀알 같은 영화다.
내 마음의 풍금ㆍ해피엔드(1999)
1999년 한 해 동안 전도연은 극과 극을 오가는 연기변신으로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파를 던졌다. 3월 개봉한 ‘내 마음의 풍금’에선 총각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17살 늦깎이 초등학생이었지만, 12월 개봉한 ‘해피 엔드’에선 불륜에 빠진 유부녀로 파격 변신했다. 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전도연의 ‘광폭 연기’에 천의 얼굴, 팔색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내 마음의 풍금’ 개봉 당시 전도연의 나이는 26살. 극중 나이 17살이 어색하지 않은 동안 외모가 지금 봐도 놀랍다. 강원도 산골 소녀 홍연(전도연)의 순박한 짝사랑을 절로 응원하게 만드는 전도연의 사랑스러운 매력에 영화를 보는 내내 웃음짓게 된다. 홍연의 사랑을 받는 어리바리 총각 선생님 이병헌과의 호흡도 좋았다(전도연과 이병헌은 2015년 영화 ‘협녀, 칼의 기억’에서 재회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알콩달콩 로맨스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도연은 과감한 ‘배신’으로 관객을 충격에 몰아넣는다. ‘해피 엔드’에서 치정극의 주인공이 된 전도연은 파격적인 베드신과 불륜으로 파멸해가는 여자의 감정적 굴곡을 연기하며 전작의 그림자를 싹 지워냈다. 극과 극의 장르, 상반된 두 캐릭터를 소화해낸 괴물 같은 연기력이었다. 이후 전도연은 한국영화를 이끌 연기파 배우로 불리기 시작했다.
밀양(2007)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2000)에서 화끈한 액션에 도전했던 전도연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인어공주’(2004), ‘너는 내 운명’(2005) 등 멜로물에 연이어 출연하며 감정 연기를 단련했다. 그렇게 멜로퀸으로 자리잡아 가던 중 운명 같은 영화 ‘밀양’(2007)을 만나 또 한번 자신을 성장시켰다. 이 영화에서 남편과 아이를 잃은 여자의 처절한 고통과 삶에 대한 애증을 그려낸 전도연의 연기는 비평의 영역을 넘어선다. 훌륭한 선장(이창동 감독), 믿음직한 동료(송강호)와의 호흡이 전도연의 잠재력을 일깨웠다. 이창동 감독은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뒤 교회에 의지하게 된 신애(전도연)를 통해 종교적 구원과 용서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쉽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전도연은 최적의 도구였다. 당시 미혼이었던 전도연은 유괴로 아이를 잃은 신애의 감정을 충분히 연기하지 못한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칸국제영화제는 그에게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안겼다. ‘칸의 여왕’이란 수식어는 전도연이 스스로 노력해 성취해낸 결실이었다.
무뢰한(2015)
연기 대가의 반열에 오른 전도연에게 연기력에 대한 칭찬은 이제 식상하다. 하지만 연기를 잘하는 게 너무나 당연해서, 그 당연함이 때론 배우의 진가를 가리기도 한다. ‘밀양’ 이후 몇 년간의 전도연이 그랬다. 드높이 올라간 대중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오직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뿐. 전도연은 영화 ‘무뢰한’을 만나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이 영화에서 사람을 죽이고 잠적한 애인 박준길(박성웅)을 기다리는 술집 여자 김혜경 역을 맡은 전도연은 정체를 숨긴 채 자신의 곁을 맴도는 형사 정재곤(김남길)에게 흔들리는 마음을 단 몇 마디 대사와 눈빛만으로 설득해내며 관객을 압도한다. 밑바닥 인생 혜경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담아낸 전도연의 까칠하고 메마른 얼굴이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는 영화다. 비록 흥행 성적은 아쉬웠지만,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고 마니아 팬까지 생겨났다. 이 영화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중 열린 부일영화상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 눈물을 흘린 전도연은 그간의 흥행 부진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 “오랜만에 받는 상이 나를 격려해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공교롭게 ‘굿와이프’에서 전도연의 배역 이름도 김혜경인데, 전도연을 모델로 대본을 집필하던 작가가 ‘무뢰한’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후문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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