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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대하는 기성세대 두얼굴... 가능성만 예찬, 세력화는 통제

입력
2016.07.1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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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시대를 개척하는 청년에 대한 예찬은 많다. 그러나 그 예찬은 기성세대의 평가일 뿐이다. 청년 담론은 청년이 만들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당당하게 시대를 개척하는 청년에 대한 예찬은 많다. 그러나 그 예찬은 기성세대의 평가일 뿐이다. 청년 담론은 청년이 만들어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자기계발의 서사에서 가장 빈번히 그 대상이 된 것은 ‘청년’이었다. 이 특정 세대는 부단히 호출받는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그 존재가 규정되어 왔다. 많은 이들이 ‘청년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그러는 동안 여러 수사가 덧붙었다.

예컨대 ‘청춘이다’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다음과 같은 제목의 자기계발서들이 나타난다. “미쳐야 청춘이다” “도전해야 청춘이다” “꿈꾸어야 청춘이다” 등등. 검색어를 조금 확장해보면 “청춘, 거침없이 달려라” “버텨요 청춘” “공자가 청춘에게” 등등…. 그 제목만으로도 한 지면을 가득 채울 분량이 된다.

그런데 ‘청년’ 혹은 ‘청춘’이 유통되고 소비되는 방식은 이처럼 ‘예찬’이었다. 그 앞에는 대개 ‘꿈꾸다’ ‘도전하다’ ‘달리다’와 같은 긍정의 수식어가 붙었다. “아프다”라고 표현이 들어갈 때도 “청춘은 언제나 눈부시다” 따위의 부연이 함께 하곤 했다.

청년 예찬, 1910년에 이미 넘쳐났다

사실 ‘청년’이라는 단어는 근대 시기에 이르러 탄생한 이래 지속적으로 예찬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청년이라는 단어가 유행이 된 1910년대에는 지금보다도 더욱 그 정도가 심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민족을 구원하고 새로운 문명을 건설할 ‘유일한’ 주체와도 같이 묘사되었다.

이 시기에 출간된 ‘청춘’ ‘학지광’ 같은 여러 매체들을 참조해보면 청년은 이전 세대와는 구분되며, 또한 전에 없던 새로운 ‘종족’처럼 묘사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광수는 소설 ‘무정’을 쓰던 젊은 날에 “(청년은) 선조도 없는 사람, 부모도 없는 사람으로 천상으로부터 강림한 신종족”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했고, 익명의 누군가는 ‘제2민족’이라는 표현을 쓰며 그간의 역사적 주체들과 완전히 결별을 선언했다. 이전 세대와의 연속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자신들의 시대적 역할을 내세운 것이다.

민족의 구원자나 영웅이라는 ‘청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계발이 필요했다. 다른 세대에게는 음주, 흡연, 도박 등 풍기문란 행위에 대한 ‘절제’가 요구됐으나, 이 시기 청년은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우선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했다. 서구 분과학문이나 유입된 여러 사조를 공부해야 했다. ‘울긋불긋한 딱지본 소설’이 아닌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곁에 두어야 했고, 야구ㆍ승마ㆍ조정 등 근대 스포츠를 즐기는 일 역시 근대인으로서의 육체를 계발하는 일이었다. 반면 계발하지 않는 청년에게는 ‘부랑’청년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우리 사회가 계발에 실패한 청년들을 ‘잉여’ ‘루저’ 등으로 빗대는 것과 같이, 그때도 그랬다.

청년을 예찬하는 자 누구인가

그런데 근대와 현대의 청년 예찬은 닮은 데가 있지만, 그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앞선 시기의 청년은 예찬으로서의 청년담론을 스스로 생산해 낼만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수 엘리트가 주도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자기 계발의 서사 역시 스스로 만들어 냈다. 과거와 결별하고, 미래를 선도하는 주체로서, 여타 모든 세대와 경쟁해 나갔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 세대는 자신들을 규정할 만한 최소한의 장마저 강탈당했다. 예찬도, 비난도, 오로지 기성세대의 몫이다. 아파도 된다며 위로하는 이도, 왜 분노하지 않는가 묻는 이도, 심지어 이것은 왜 청년이 아니란 말인가, 하고 반론을 펼치는 이도 모두 청년이 아니다. 가장 빈번히 호출되는 주체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수동적인 피주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청년이 주체가 되어 발화의 장으로 나오고자 할 때, 그 가능성을 예찬하던 이들은 오히려 검열하고 통제하는 편에 선다. 우리는 최근의 총선에서 기성 정치인이 청년 정치인을 대하는 태도를 지켜보았다. 더불어민주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은 “국회가 청년 일자리 구해주는 곳 아니다”라며 선거를 시작했다. 청년 비례대표 경선을 치르는 동안에도 면접 시간이 5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거나, 400만원에 이르는 참가비와 당비를 납부해야 했다는 등 여러 잡음이 있었다.

예찬되나 목소리는 빼앗긴 청년

그 과정에서 상처 입은 여러 청년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SNS나 팟캐스트에서 풀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온라인의 개인 공간에서 주로 맴돌았다. 그러고도 단 한 명의 청년이 당선 가능성이 희박한 커트라인의 바깥에 배치되었을 뿐이다. 비슷한 일이 다른 당에서도 벌어졌고 결국 20대 국회에 입성한 청년 정치인은 3명, 전체 정원 300명의 정확히 1%에 불과하다. 19대 최연소 국회의원인 김광진은 5년 간 12개의 청년 법안을 발의하며 분투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 했고, 같은 당의 청년 정치인 장하나 역시 공천을 받는 데 실패했다. 청년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강력한 발화자를 잃었다.

지난 총선 당시 공천탈락자들로 구성된 더불어민주당의 더컸유세단. 청년에 대한 얘기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결국 제일 먼저 배제된 이들도 청년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총선 당시 공천탈락자들로 구성된 더불어민주당의 더컸유세단. 청년에 대한 얘기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결국 제일 먼저 배제된 이들도 청년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선거 이후에는 국민의당 모 최고위원이 “30대가 되면 자기 분야에서 일하는 게 옳다”며 사실상 ‘30대 정치불가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이처럼 각 당에서는 ‘청년’을 부르짖었지만, 직접 발화하겠다며 장에 뛰어든 청년들에게는 어떻게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나마의 권력을 빼앗아 오는 데 몰두했다.

다른 사례로, 정치권 바깥 ‘상식의 공간’에서도 청년들은 위축된다. 대학의 청년 연구자들은 쉽게 발화의 기회를 얻지 못 한다. 2030세대 연구자들은 대개 ‘학문 후속 세대’나 ‘신진 연구자’ 등으로 규정된다. 학회나 연구소의 발표, 토론에서도 그러한 기획 안에서 움직이게 되며, 동시에 간사나 조교 직함을 달고 각종 실무를 담당한다. 행사를 준비하고, 학회지를 발송하고, 영수증 처리를 하는 것이 모두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인건비가 책정되는 일은 거의 없으며 활동하는 동안 해당 학회의 논문 게재료를 감면받는 것이 고작이다. 오직 젊다는 이유로 그러한 처우를 감내해야 한다. 청년은 그 어디에서도 동등한 발화의 자격을 갖추기 어렵다.

권력없는 청년, 유령에 지나지 않는 청년

청춘 예찬이라는 자기계발의 거짓은 그간 청년에게 주체성이라는 환상을 끊임없이 덧입혀 왔다. 그 결과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표상으로서의 청년, 그러한 유령이 탄생했다. 청년 문제를 섬세하게 들여다보고자 했던 몇몇, 그러니까 청년들이 ‘우리 편’이라 느끼는 이들 역시 결국은 ‘기성세대’ 관찰자‘였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할 주체는 결국 당사자이며, 청년 문제를 해결할 주체 역시 청년일 수밖에 없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체 없는 예찬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 시대의 청년 권력은 이제 없다. 있다고 한다면 ‘아재’들의 추억 속에서나 존재한다. 청년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래 청년세대와 기성세대는 언제나 치열한 헤게모니 경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이처럼 청년이 이전 세대에게 완벽하게 패배를 고한 역사는 없다. 청년은 스스로가 어떠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를 목도해야 한다. 주체적 각성, 거기에서부터 다시 한 번 전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헬조선’이라는 폐허를 극복할 주체는 지금의 청년 세대이기 때문이다.

김민섭 (문화평론가)

공동기획: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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