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 가압류 때 대출금 회수 조항
다른 채권자와 평등 원칙 위배”
공정위, 은행 반발에도 직권 추진
은행 불복하면 강제 시정 나설 듯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사건을 놓고 4년간 줄다리기를 해온 시중은행들과 공정거래위원회가 조만간 ‘2라운드’에 돌입한다. 공정위가 은행권 사업자단체인 은행연합회의 심사 청구 없이 은행 표준약관 개정을 직권으로 추진하기로 한 가운데 은행들이 ‘수용 절대 불가’를 공언하고 있어서다. CD 금리 담합 의혹이 사실상 무혐의(심의절차 종결)로 마무리되며 체면을 구긴 공정위가 이번에는 자존심을 회복하겠다며 잔뜩 벼르는 모습이다.
7일 금융권에 따르면 공정위는 내달 4일부터 은행여신거래 기본약관(표준약관) 개정을 직권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공정위가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현행 표준약관 가운데 ‘가압류에 따른 기한이익 상실’ 조항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채권자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은행 예금에 가압류(자산 동결)가 걸릴 경우, 은행이 가압류가 걸린 예금을 은행 채무를 갚는 데 쓸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채무자는 물론 은행 외 채권자에게 불리한 조항이라는 것이 공정위 입장. 은행을 비롯한 복수의 채권자가 있을 때 가압류가 걸렸다는 이유로 은행이 곧바로 채무자의 예금을 가져가면 다른 채권자는 변제 받을 기회를 잃게 돼 채권자 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압류가 아닌, 법원 확정판결 이후 본압류 단계에서 은행과 다른 채권자들이 채권비율과 채권순위에 따라 공평하게 채무자의 예금을 나눠 갖는 쪽으로 약관을 고쳐야 한다는 게 공정위 입장이다.
이에 시중은행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여신 담당자는 “가압류 시 은행이 먼저 예금을 처분할 수 있다는 것이 대법원의 일관된 판례이며 일본, 독일 등 선진국도 한국과 비슷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면서 “약관이 바뀌면 은행을 믿고 돈을 맡긴 다수의 예금자에게 피해가 전가되고, 신용대출 금리 또한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견이 3개월 넘게 좁혀지지 않자 공정위는 이례적으로 약관 개정에 직권으로 나서기로 했다. 관련법상 공정위가 표준약관을 고치려면 약관을 개정해달라는 사업자단체의 심사 청구가 필요하지만, 시중은행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은행연합회는 심사 청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결국 공정위가 ‘심사 청구를 하라는 공정위 권고를 받은 사업자단체가 4개월 이내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관계부처 협의 등을 거쳐 표준이 될 약관을 제ㆍ개정할 수 있다’는 조항을 내세워 내달 초 직권 개정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공정위가 직권으로 표준약관을 바꾼다 해도 갈등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개별 기업의 개별약관이 공정위 표준약관과 다르더라도 불법이 아니어서, 바뀌는 표준약관을 따르지 않고 현행 개별약관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은행권의 공통된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공정위는 은행들에게 표준약관을 따를 것을 권고할 수 있는데, 이를 거부하는 은행은 개별약관과 표준약관의 차이점을 소비자의 눈에 띄게 표시해야 한다. 이런 상황까지 갈 경우 공정위 표준약관의 권위는 크게 손상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은행들이 표준약관을 따르지 않을 경우 공정위가 개별약관을 ‘불공정 약관’으로 규정해 강제 시정조치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법무법인 광장에 법률 검토를 의뢰하는 등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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