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이다. 하루는 폭우가 쏟아지고, 다음날에는 햇볕이 맹렬한, 징검다리식 장마다. 야외 활동을 방해하는 비가 야속할 때도 있지만 더위를 식혀 줘 반갑기도 하다. 창 밖을 보며 우수에 젖는 이 계절에 영화만큼 좋은 친구도 드물다. 비의 서정이 담긴 영화라면 더할 나위 없다. 비가 스크린으로 잘 스며든 영화들을 돌아봤다.
호우시절(2009)
충무로의 멜로 대가 허진호 감독 연출작. 중국 쓰촨성에 출장을 간 대기업 과장 동하(정우성)가 미국 유학 시절 풋사랑이었던 중국 여인 메이(고원원)와 우연히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사연을 그렸다. 키스도 하고 자전거 타는 법도 가르쳐 줬다는 동하, 키스는커녕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밀쳐내는 메이. 하지만 두 사람은 설레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동하는 예정된 출장 일정을 넘겨 매이와 데이트하려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비가 온다는 의미의 제목부터가 낭만을 자극한다. 당초 중국 쓰촨성 지원으로 만들어지는 옴니버스영화의 한 에피소드였으나 상업성을 인정 받아 장편으로 덩치를 키웠다. 서글서글한 눈매의 정우성과 청초한 이미지의 고원원의 외모 앙상블이 눈길을 끌었던 작품이다.
라디오 스타(2006)
과거의 영광에만 젖은 철부지 가수와 그를 오래도록 보살펴 온 매니저의 이야기. 1988년 10대 가수로 선정된 뒤 대마초 흡연과 폭행 사건 등으로 추락을 거듭하던 최곤(박중훈)은 강원 영월의 한 방송국 라디오 DJ 제안을 받는다. 데뷔 때부터 최곤과 함께 했던 매니저 박민수(안성기)는 마지막 재기의 기회라며 최곤을 설득해 강원도로 내려간다. 강원도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 활기를 얻어가던 두 사람은 예상치 못했던 사건으로 결별을 맞이한다.
최곤이 부르는 노래 ‘비와 당신’만으로도 비의 낭만을 되새기게 하는 영화다. 최곤과 박민수가 빗속에서 재회하는 장면이 영화를 상징한다. 한동안 박중훈과 안성기가 우산을 들고 다니며 여러 자리에서 이 장면을 재현할 정도로 사람들 뇌리에 각인됐다. 이준익 감독의 음악 3부작(‘즐거운 인생’과 ‘님은 먼 곳에’) 중 첫 자리를 차지하는 영화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한국영화에서 이렇게 비를 낭만적이면서도 쓸쓸하게 다룬 영화도 드물다. 장르는 형사물. 살인청부업자 장성민(안성기)을 쫓는 우 형사(박중훈)의 사연이 줄거리를 이룬다. 성민이 부산 계단에서 칼로 청부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묘한 우수를 자아낸다. 사람이 스러진 뒤 살인 현장 위로 폭우가 쏟아지고 비지스의 명곡 ‘Holiday’가 울린다. 계단과 거리에 달라붙은 누런 은행잎, 트렌치코트를 입은 뒷모습을 남기고 사라지는 성민의 모습이 눈동자에 오래도록 남는다.
영화의 절정에서도 스크린은 비로 흠뻑 젖는다. 탄광 앞에서 마주친 성민과 우 형사는 빗속에서 육탄전을 펼친다. 한때 국내 드라마와 코미디에서 지겹도록 패러디했던 명장면이다. 이명세 감독은 전작 ‘남자는 괴로워’(1995)에서도 비로 멋들어진 장면을 연출했다. 할리우드 고전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패러디한 장면으로 ‘싱잉 인 더 레인’ 대신 ‘아빠의 청춘’을 배경 음악으로 삼았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1990)
새로운 한국영화를 부르짖으며 등장한 곽재용(‘엽기적인 그녀’) 감독의 데뷔작이다. 한국영화는 영상미가 떨어져 외면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곽 감독은 알록달록한 색감과 낭만적인 소품들을 동원해 관객들의 눈길을 끌어낸다. 제목부터가 지극히 시각적이어서 개봉 당시 화제를 모았다.
한 지방 유지의 집안에 입양된 남자 지수(강석현)와 양부모의 딸 지혜(옥소리) 사이의 미묘한 감정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그려냈다. 허술한 이야기 틀로 신파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남다른 영상으로 신세대의 감성을 자극했다. 화제에 비해 크게 흥행하지는 못했다. 강인원 권인하 김현식이 함께 부른 삽입곡 ‘비 오는 날의 수채화’는 영화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다. ‘빗방울 떨어지는 그 거리에 서서 / 그대 숨소리 살아있는 듯 느껴지며 / 깨끗한 붓 하나를 숨기듯 지니고 나와 / 거리에 투명하게 색칠을 하지…’라는 가사가 당대 청춘의 감성을 대변한다.
내일을 향해 쏴라(1970)
고전 범죄물이지만 낭만적인 장면으로도 유명하다. 19세기 말 미국 서부를 떨게 했던 전설적인 은행 강도 선댄스 키드(로버트 레드포드)와 부치 캐시디(폴 뉴먼)를 스크린 중심에 세운 영화다. 서부 소도시를 전전하며 은행을 털고 보안관에 쫓기는 키드와 캐시디를 통해 서부 개척기의 무법적이면서도 낭만적인 풍경을 스크린에 재현한다. 보안관에게 쫓기다 결국 남미 볼리비아까지 간 두 사람은 은행털이를 이어가고 작은 부주의로 최후를 맞는다.
영화 속에는 선댄스, 부치와 행동을 함께하는 여인 에타(캐서린 로스)가 등장한다. 부치와 에타가 자전거를 타고 이른 아침의 공기를 즐기는 장면이 낭만과 서정을 자아낸다. 남녀의 화사한 웃음 위로 흐르는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는 올드 팬들의 가슴을 여전히 적신다. 영화 속에서 비는 오지 않는데 이 노래 때문에 비를 연상시키는 영화로 종종 호명된다. 감독 조지 로이 힐.
※사족 같은 부록
사랑은 비를 타고(1952)
뮤지컬영화의 전설인 ‘사랑은 비를 타고’를 빼고 비와 영화를 말할 순 없다. 코미디언 록우드(진 켈리)가 빗 속에서 춤추며 흥겹게 부르는 ‘Singing in the Rain’은 영화사에 굵고 짙게 새겨진 명장면. 비가 오면 생각나는 너무나도 진부한 영화가 됐지만 그래도 빼놓은 수 없는 영화.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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