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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있는 박세리/사진=하나금융그룹 골프단 제공.
[한국스포츠경제 박종민] 골프 홀컵의 지름은 108mm(4.25인치)다. 그래서인지 '백팔번뇌(百八煩惱)'를 해야 골프를 잘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박세리(39ㆍ하나금융그룹)가 미국 언론과 작별 인사를 하기까지도 만감이 교차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최고 권위의 대회 US여자오픈에 특별초청을 받은 박세리는 7일(한국시간) 공식 기자회견에서 "미국에서 출전하는 마지막 대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8일부터 열리는 US여자오픈은 박세리의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6년 프로에 뛰어든 그는 1998년 메이저대회인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현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승을 거뒀다. 하지만 박세리의 이름이 확실히 각인된 시기는 바로 같은 해 7월 열린 US여자오픈 때였다. 박세리는 당시 20세9개월8일이라는 최연소의 나이로 우승을 차지했다. 박세리는 경기 중 물가에 떨어진 공을 살리기 위해 양말을 벗고 연못으로 들어가 공을 쳤다. 새까맣게 그을린 종아리와 대비된 하얀 발은 보는 이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외환 위기에 시름하던 국민에게 박세리의 '맨발 투혼'은 커다란 희망을 안겨다 줬다.
메이저대회 5승을 포함, LPGA 통산 25승을 올린 박세리는 동료와 후배들에게도 귀감이 됐다. 어린 시절 박세리를 보고 자란 이른바 '세리키즈'들은 한미일 투어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박세리가 지난 3월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세리키즈 중 한 명인 안신애(26ㆍ해운대비치골프앤리조트)는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선배님은 오로지 골프만 보고 달려오셨다. 존경스럽다"며 "후배들이 향후 은퇴시기를 잡는 데 좋은 롤모델이 되신 것 같다. 선수들에게 오래 뛸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셨다"고 존경심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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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리/사진=하나금융그룹 골프단 제공.
지난해 대회장에서 만난 한 남자프로는 박세리를 '누나'로 모시며 종종 식사도 같이 한다고 털어놨다. '카리스마가 넘쳐서 후배들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선배는 아닌가'라는 기자의 말에 남자프로는 고개를 내저으며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섬세하고 다정하신 분이다. 후배들을 따뜻하게 챙겨주신다"고 밝혔다. 박세리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츤데레(도도하고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였던 셈이다.
박세리는 골프 대디 박준철 씨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연습벌레로 자랐다. 2000년대 초중반 LPGA 대회 개막을 하루 앞둔 날 퍼터를 잡은 채 아버지를 향해 "골프만 가르쳐주시고 왜 쉬는 법은 알려주지 않으셨느냐"고 울먹인 박세리의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박세리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함께 국내 대회장에 들를 때마다 입구에 놓여 있는 우승 트로피를 꼭 만져봐야 했다고 한다. 담력을 키우기 위해 한밤 중 공동묘지에 가야 했다는 일화는 와전된 부분이 있었다고 훗날 고백했지만, 이런 전언들은 박세리가 골프 '히로인'이 되기 위해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 짐작케 한다. 놀라운 일화들과 강렬한 인상, 그가 만들어온 성공 신화들이 어쩌면 박세리를 '위엄 있고 다가가기 힘든 골퍼'로 인식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박세리는 자신에게 의미가 남다른 US여자오픈에서 공교롭게도 '세리키즈'인 유소연(26ㆍ하나금융그룹), 최나연(29ㆍSK텔레콤)과 한 조를 이뤘다. 유소연은 2011년, 최나연은 2012년 이 대회 정상에 올랐다. 자신을 롤모델로 삼아 온 후배들과 한 타 한 타 칠 때마다 지난 20년간 필드 위에서 겪었던 온갖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기억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듯 보인다. 지금껏 하지 못했다고 밝힌 '즐기는 골프'도 이번 대회에선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종민 기자 mini@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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