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 호우 경보가 내려진 5일 오전 7시. 최고 속도의 와이퍼 움직임에도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정도의 장대비를 뚫고 국민의당 의원과 당직자, 보좌관 등 263명이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 모였습니다. 어둑한 아침을 뚫고 이 많은 인원이 피곤한 표정으로 모인 그림만 놓고 보면 뭔가 당의 운명을 시급히 결정할 회의라도 열리는 모양새였습니다. 하지만 대회의실에 걸려 있는 행사 제목은 ‘성희롱 없는 성평등 국회로' 였습니다. 진중한 분위기와 미묘하게 어긋나는 성희롱 예방교육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1시간 여 진행된 이날 행사는 표면적으로 7월 1일부터 7일까지 제21회 양성 평등 주간을 맞아 실시된 교육 프로그램으로 분류됩니다. 여기에 정치사적 의미를 조금 더 부여하자면, 일반 기업이 아닌 기성 정당이 선제적으로 성희롱 예방교육을 실시한 첫 번째 시도라는 정도가 추가됩니다. 그럼에도 뭔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남습니다. 김수민 의원의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 사태로 창당 이후 최대 위기를 맡은 국민의당의 상황을 고려할 때 “뭔가 한가한 시도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선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을 먼저 주목해야 합니다. 박 위원장은 여의도 정치권에서 자칭 타칭 ‘정치 9단’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정치 전략과 예측력에 있어서는 여야 통틀어 최고수로 꼽히는 그가 지난 30일 기나긴 정치 인생 중 세 번째 비대위원장을 맡은 뒤 선보인 첫 공식행사가 성희롱 예방교육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박 위원장은 행사가 끝난 뒤 “오늘 교육은 성폭력, 성희롱 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고 20대 국회는 달라져야 한다는 국민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작지만 의미 있는 실천이라고 생각한다”며 “앞으로도 국민의당은 선도정당으로 일하면서 싸워 우리 내부의 우상(偶像)을 추방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집중해야 할 부분은 ‘선도 정당’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동안 박 위원장은 각종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의당은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가 아닌 리딩 보터(Leading voter)”라는 말로, 3당 체제에서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에 끌려 다니지 않는 개별적 주체라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런 그가 이날 갑자기 선도 정당이라는 새 단어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국민의당 한 핵심 당직자는 “리딩 보터가 원내 정책 현안에 대해 독자적 목소리를 내 존재감을 확보하겠다는 의미라면, 선도 정당은 구악(舊惡) 이미지의 한국 정치 문화를 깨나가는 일을 국민의당이 먼저 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이날 행사 정체에 대한 의문이 해소됩니다. 이날 성희롱 예방교육은 국민의당이 “김수민 의혹에서 벗어나 다시 ‘새정치’를 하겠다”는 틀에 박힌 선언 대신 선택한 전략적 카드였던 것입니다. 선도 정당이라는 기치 아래, 실추된 당의 도덕성 문제를 작고 사소한 변화 시도로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얘기죠.
실제로 선도 정당을 위한 국민의당의 행보는 이후에도 구체화됐습니다. 매주 화요일 오전 정기적으로 의원 총회를 열고, 이 자리에서 당의 사무총장이 정당의 국고보조금 지출 내역을 매월 한 차례 공개하고, 그외 당의 디테일한 당무를 전략홍보본부장, 국민소통본부장 등이 보고하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박 위원장은 “제가 알기로 정당 의원총회에서 사무총장 등이 정기적으로 당무를 보고하는 것은 처음 시도되는 것”이라며 “회계 및 당무 보고를 통해 과거를 파헤치자는 것이 아니라 선도정당으로 나아가자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굳이 ‘김수민’이라는 아픈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으면서 당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전략이 선도 정당이라는 단어 안에 내포됐다는 의미입니다.
예방교육을 받고 나온 의원들과 당직자들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한 의원은 “당선 이후 거의 매일 아침 7시 22차례에 걸쳐 당이 주최한 공부하는 워크숍에 참석하다 보니 이 시간에 출근하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고 웃으며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런 교육까지 받았으니 당내 성희롱은 없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야권에서 보좌관으로 10년 넘게 일한 한 당직자는 “일반 기업에서 성희롱 예방교육 등이 시스템화 됐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정당을 직장으로 가진 내가 이런 교육을 받을 지는 몰랐다”며 “처음이었지만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행사를 최초로 기획한 최경환 비상대책위원장 비서실장은 “교육 자체도 필요했고 당의 분위기 쇄신과 추진력을 얻기 위한 의미로도 유용했다”며 “앞으로도 선도 정당을 구체화 할 신선한 시도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선도 정당을 외친 국민의당의 다음 행보를 예측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하지만 장대비를 뚫고 모인 그 의지라면 ‘김수민 의혹으로 불거진 당내 갈등과 위기’도 돌파가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도 조심스레 해봅니다. 적어도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만들어 준 국민들은 ‘국민의당 소멸’보다 ‘3당으로 순기능’을 해주길 아직은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정재호 기자 next8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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