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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군애국 거스르자... ‘민중’은 만민공동회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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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군애국 거스르자... ‘민중’은 만민공동회를 떠났다

입력
2016.07.0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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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장면. 인구 20만 도시 한성에서 2만명 이상이 운집한 대규모 집회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만민공동회 장면. 인구 20만 도시 한성에서 2만명 이상이 운집한 대규모 집회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파의 신화가 ‘지도자’라면, 좌파의 신화는 ‘민중’이다. 좌파에게 ‘지도자’란 ‘가소로운 독재자’요, 우파에게 ‘민중’이란 ‘어리석은 군중’에 불과하다. 허나 자기 진영 내부에서만큼은 ‘지도자’와 ‘민중’은 신성불가침의 단어다. 우리의 경제성장이 박정희 덕이야 아니냐는 식의 이런저런 이분법적 논란, 혹은 저소득층은 왜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는 계급배반투표를 하느냐는 질타들은 대개 이런 구분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더듬어보면 생각만큼 이 구분선이 명확하지 않다.

독립협회 창립 120주년을 맞아 7일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최로 열리는 ‘독립협회와 21세기 대한민국’ 학술대회에서 발표되는 김종학 서울대 교수의 논문 ‘서재필의 개혁구상과 독립협회’는 이런 점에서 눈길을 끈다. 오늘날에도 시민운동단체 등이 집회나 시위의 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는 ‘만민공동회의 민중적 성격’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어서다.

김 교수가 주목하는 지점은 독립협회가 내건 슬로건이 ‘충군애국’이었다는 점이다. 독립협회의 애초 목표는 ‘개진(開進)을 넘은 개화(開化)’였다. 개화당이 황권을 제한하는 근대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는 이들이라면, 개진당은 황권 중심의 점진적 개혁안을 내놓은 이들이다. 독립협회는 보수파보다는 오히려 고종 주변의 개진당 인사들을 제거하는데 역점을 뒀다. 고종이 개혁 시늉만하다 마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화당 인사들이 ‘충군애국’을 입에 달고 살았던 건 일본을 끌어들여 갑신정변을 일으킨 원죄 때문이다. 김 교수는 “조선왕조 500년을 지탱한 유교사상의 전통은 여전히 강고했고, 또 개화세력은 외세를 이용해온 전력이 있었으므로 오히려 더 충군애국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작용한 셈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진짜 고종을 위한다면 번다한 사무를 신하 등에게 일임해야 한다는 논리도 개발했다. “실제로는 국왕의 인사권과 국정간여를 제한”하면서도 괜한 부담주지 않는 게 충군애국이라는 논리였다.

노인복지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린 노인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는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지금까지도 여러 형태의 집회에 원용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노인복지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린 노인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는 참여민주주의의 상징으로서 지금까지도 여러 형태의 집회에 원용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상황에서 서재필 등 독립협회 지도부는 1897년 8월 독립신문 발행만 하던 데서 벗어나 인민 토론회를 여는 단체로 전환키로 결의했다. 당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가 “인민에 대한 권리 계몽은 혁명 관념을 조장할 것”이라 경고했음에도 대중적 인민토론회를 연 까닭은 1896년 11월 독립문 축성 행사의 성공 등으로 독립협회의 덩치와 힘이 세졌기 때문이다.

이후 고종에 대한 상소운동 전개 등 실질적 실력행사에 들어갔고, 1898년 3월 마침내 1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말 그대로 만민, 사농공상 구분 없이 모두가 나와 제각각 발언을 하는 정치적 공간이 탄생한 셈이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만민공동회는 점점 독립협회의 손에서 벗어났고 한번 열릴 때마다 2만명 이상의 인원을 꾸준히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만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으로 치자면 100만명이 종로에 운집한 셈이다. 그냥 모이기만 한 게 아니라 온갖 체포, 탄압, 습격에도 불구하고 항의 시위를 벌이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불타오르던 만민공동회는 왜 그 해 12월 말을 기점으로 그만 사그러들었던가. 고종이나 보수세력의 집요한 탄압 때문만이었다고 말하면 ‘무결점 민중 신화’를 지켜내는 데는 이상적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김 교수는 강경파들이 “중추원에서 박영효의 귀국을 주장하고는 보신을 위해 만민공동회에서 이를 추인받으려 했”다는 점을 결정적 이유로 꼽았다. 갑신정변의 주도자로서 “황제의 가장 큰 반역자”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박영효를 만민공동회가 귀국시키려 한다는 점이 드러나자 그토록 뜨겁던 만민공동회는 금세 주저앉았다.

어쩌면 그 민중은 자유주의적 개혁에 동의했다기보다 ‘충군애국’이란 슬로건을 진심으로 믿었던 건 아닐까. 김 교수는 “개혁세력이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것은 황실도, 일본도, 러시아도 아닌 조선인들의 심성에 깊이 각인된 유교의 사상적 유산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만민공동회의 감격은 오래 살아남았고, 지식인들은 당시의 군중에게 민중이라는 새 이름을 붙이고 역사적 의의를 부여했다”고 덧붙였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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