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원더걸스 멤버 혜림에게는 최근 손톱을 바짝 깎는 버릇이 생겼다.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서 손톱이 길면 연주하는 데 불편함을 느낀 뒤부터다. 화려하고 싶은 걸그룹 멤버인데도 네일 아트가 사치다. 최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카페. “아쉬울 때도 있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기타를 쳐야 하니까….” 새 미니음반 ‘와이 소 론리’의 발매(5일)를 맞아 만난 원더걸스의 멤버 혜림이 기자에 두 손을 쫙 펴 보여주며 덤덤하게 말했다. 손톱은 하나같이 뭉뚝했다.
원더걸스는 지난해 8월 앨범 ‘리부트’를 내면서 4인조 여성 밴드로 활동 방향을 틀었고 멤버들의 일상도 변했다. 베이스를 연주하는 선미는 “줄 갈아야 하는데…”란 걱정을 달고 산다. 사비를 들여 최근 건반을 샀다는 예은은 악기 관리에 예민해 소속사인 JYP엔터테언먼트(JYP)의 사옥(서울 청담동) 인근 빌딩 지하 1층에 마련된 합주실의 ‘사감’이 됐다. 예은은 “(보이그룹)데이식스랑 합주실을 같이 쓰는 데, 악기 관리 등 때문에 한 소리를 한 적이 있다”며 웃었다. 합주실과 악기 얘기가 나오자 원더걸스 멤버들의 얼굴에 생기와 웃음이 돌았다. 황금색 드레스를 입고 ‘총알춤’(히트곡 ‘노바디’의 춤)을 추던 걸그룹에게서 보지 못했던 낯선 모습이다.
원더걸스 네 멤버는 2년 여 전부터 악기를 배웠다. 하루에 평균 3~4시간씩 악기 연습을 한다는 원더걸스는 새 앨범에 실린 ‘아름다운 그대에게’ 등 3곡의 연주 녹음도 스스로 했다. 선미는“‘리부트’에선 우리가 직접 연주 녹음을 하진 않았다”며 “이번엔 우리가 합주 녹음까지 해야겠단 생각으로 곡을 만들고 녹음했다”고 말했다.
새 앨범에서 원더걸스는 두 가지 실험을 했다. 데뷔 후 처음으로 레게 음악에 도전했다. 인터뷰 장소에서 먼저 들어 본 타이틀곡 ‘와이 소 론리’는 쟁쟁거리는 가벼운 기타 연주에“베이비 아임 소 론리”라고 속삭이는 듯한 후렴구가 구수하면서도 흥겨웠다. 레게 음악이 지닌 따뜻한 아날로그적 분위기가 그간 복고를 주 콘셉트로 내세워 활동해 온 그룹 이미지와 제법 어우러진다. 지난 2008년 낸 앨범 ‘소핫’부터 원더걸스와 함께 작업해 온 홍지상 작곡가가 “이런 비트 어때?”라고 들려 준 소리에 끌려 작업이 시작됐단다. ‘와이 소 론리’작곡에 참여한 선미는 “‘꿍짝 꿍짝’하는 멜로디와 비트가 옛 악단이 연주하는 느낌이었다”며 “김건모 선배님의 레게 스타일의 곡 ‘핑계’도 많은 사랑을 받았고, 우리 트로트와 비슷한 느낌이 있어 귀에 꽂혀 곡을 만들게 됐다”고 곡 작업 뒷얘기를 들려줬다.
두 번째 실험은 ‘탈 박진영’이다. 원더걸스가 JYP 대표 프로듀서인 박진영이 만든 곡이 아닌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정해 활동하기는 2007년 데뷔 후 처음이다. 이 실험은 지난해 8월 둘째 주 박진영이 원더걸스에 보낸 장문의 카카오톡 메시지 하나로 시작됐다. ‘다음 앨범부터는 너희끼리 해 봐’, ‘이젠 너희들이 곡 만들어서 가져와’란 통보성 내용이었다. 예은은 “‘아이 필 유’로 한창 활동하고 있는 데 그런 메시지를 받아 다들 어리둥절했다”며 “‘이제 너희들 자전거 탈 때 뒤에서 잡아준 거 놓을 테니 너희들이 직접 몰아 봐’란 느낌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박진영이 원더걸스에게 보낸 홀로서기 통보에 네 멤버는 ‘아이 필 유’ 활동이 끝난 지난해 10월부터 곡 작업을 시작했다. 원더걸스는 10여 곡을 만들었고, 그 중 1960~1970년대 밴드 음악 느낌이 나는 예스러운 세 곡을 골라 직접 앨범을 꾸렸다.
원더걸스는 지난 9년 동안 숱한 역경을 겪었다. 현아와 소희, 선예가 차례로 탈퇴할 때마다 팀은 흔들렸다. ‘텔미’(2007), ‘소핫’, ‘노바디’(2008)의 연이은 성공으로 화려한 꽃길을 밟던 ‘국민 걸그룹’은 2009년 미국 진출에 도전하며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버스 안에서 잠을 자는 고생을 사서 했다. 2015년 팀의 기둥이던 리더 선예가 팀을 떠나면서 팀의 해체가 유력해 보였지만, 이들은 밴드 콘셉트로 변화를 줘 오히려 새 출발을 알렸다. 보이그룹에 비해 생명력이 짧은 걸그룹으로서의 핸디캡을 딛고, 댄스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자생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점도 많다. 2007~2009년 데뷔한 걸그룹 카라와 포미닛이 해체하는 등 2010년대 초반 일본과 중국, 미국 등에서 한류 열풍을 이끌었던 2세대 걸그룹들이 생명력을 다해 추억 속으로 사라진 것과 대비된다. 예은은 “원더걸스의 새로운 방향에 대해선 박진영 오빠와 고민을 많이 했다”며 “스스로 악기를 배우며 자생력을 키우고 싶었고, 그 부분을 회사에서 ‘밴드는 돈 안 돼’라고 거부하지 않고 지원해줘 고맙다”고 말했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데뷔 10주년을 앞둔 원더걸스는 단단했고, 여유로웠다. 이들은 “전성기가 지났다고 원더걸스가 끝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옛날에는 미국에서의 성공 같이 큰 목표를 많이 잡았는데, 이젠 그런 것 보다 스스로의 음악적 만족이 더 중요하고 신경이 쓰여요. 트와이스 등 많은 걸그룹 후배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오래, 그리고 멋지게 살아 남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지에 대한 책임감도 들고요.”(예은)
“밴드를 하게 되면서 여러 상상을 해봐요. 단독 공연에 단체로 ‘텔미’를 부르다, 악기 들고 나와 연주하는 모습 같은 걸요. 멤버들이 솔로 활동에서 원더걸스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그런 다양한 무대를 생각하면 흐뭇해져요.”(유빈)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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