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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두둑 비오는 날 비자림 흙길을 맨발로 타박타박

입력
2016.07.03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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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비자림 풍경.
비오는 날의 비자림 풍경.

섬진강 옆 하동 악양의 어느 마을 오솔길에서, 꾸물거리던 하늘은 기어이 소낙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때마침 길 옆에 작은 집이 있어 처마 아래로 피신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았던 주말나들이에서 만난 소나기는 마음을 한없이 센티하게 만들었다.

내리꽂듯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슬레이트 지붕에서는 다다닥 소리가 끊임없었고, 지붕주름을 따라 흘러내리는 빗물은 황톳빛 흙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며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광경이, 소나무의 관능과 언덕을 뒤덮은 초록을 배경으로 한여름의 귀한 순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당장에 그 집 마루에 앉아 파전에 막걸리 한 잔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제주 입도 직전에 만났던 그 소나기를 여전히 기억한다.?제주의 비는 언제나 그 순간을 그립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껏 제주에서 만났던 비는, 순순히 곱게 내리지 않았다.?언제나 바람에 실려 옆으로 내렸다. 그래서 우산을 써봤자 온 몸이 젖는 건 피할 수 없고, 때로는 억센 바람에 우산도 온전치 못했다.?제주의 전통 초가들이 마루가 좁거나 아예 없고, 비바람이 불면 나무기둥에 걸쳐두었던 처마를 내려 전면을 아예 가려버리는 구조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 바닷가로 다니는 일은 마음을 질척거리게 하고 몸을 번거롭게 만드는 일이다.

제주는 지금 장마전선의 영향 아래에 있다. 여지없이 빗나가는 예보와는 별개로 비는 내리고 싶을 때 그러고 싶은 마음대로 내리고 있다. 때로는 거센 바람을 동반하기도 한다. 몸이 번거롭지 않으려면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맞겠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마음을 풀어놓고자 할 때 나는 숲으로 향한다.

교래 사려니 숲길 초입의 삼나무 숲길의 우중 풍경.
교래 사려니 숲길 초입의 삼나무 숲길의 우중 풍경.

제주의 숲은 멀지 않은 거리에 생각보다 깊다. 그리고 숲에서 만나는 비는 바람이 잦아들어 차분하게 내린다. 안개마저 깔린다면 몽환의 분위기 그대로,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비오는 날 교래 사려니 숲길 초입의 삼나무 숲 속에서 안개와 함께 만나는 비에 가만히 거닐어보는 것도 좋다. 생태탐방로가 조성된 어느 곶자왈 깊은 숲 속도 뚜둑거리는 빗소리와 새소리만 존재하는 고요 안으로 걸어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비 오는 날의 숲은 비자림이 제일 좋다.?울창한 숲 안으로 들어가면 내리던 비는 높은 나뭇가지와 이파리에 맺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된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이른 아침, 나는 우산이나 비옷 없이, 신발을 벗은 맨발의 상태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문명의 이기에 한없이 부드러워진 발바닥이 조금 아프긴 하지만, 송이가 깔리고 나무뿌리와 검은 돌들이 얽히고 설킨 오솔길을 질감 그대로 느끼며 걷는 기분은 어둑한 숲 속 분위기와 더불어 해방의 어떤 것이다. 내리던 비는 이따금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되어 부담 없이 맞는다.

비자림의 둥치 굵은 나무에 깔린 이끼.
비자림의 둥치 굵은 나무에 깔린 이끼.

수령 몇 백년이라는 나무 둥치에 부드럽게 깔린 이끼에는 시간의 질감이 살아있고, 하늘로 오르려다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거대한 나무둥치를 타고 매끈하게 흘러내린 물줄기는 습하고 시원한 공기 안에서 어떤 관능이기도 하다. 비자림에 갈 때엔 꼭 비가 오는 날을 택해보시라.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 아니라면 우의도 내려놓으시길. 신발은 꼭 벗으시고. 삼삼오오도 너무 많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마음이 잘 맞는 친구 단 둘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차분하게 걸어보시길 권유한다. 아픈 발바닥, 살짝 젖은 옷차림도 웃음띈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다. 그 안에서 그대로 한동안 머물며 어둑하고 깊은 숲 안의 초록과 습하고 상쾌한 공기 안에 몸을 그대로 두어보는 것도 좋겠다. 제주에 사는 육지것은 여기서 그리움을 떨쳐내었다.?비오는 날에는, 비자림 안에서 제주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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