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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복지국가의 미래, 저항하고 연대하는 시민 손에

입력
2016.07.0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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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백년 후 역사책에 지금의 한국사회는 어떻게 묘사될 것인가? 예전에 나는 우리 시대를 ‘야만의 시대’로 묘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비참한 전쟁을 겪어내고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며 소위 한강의 기적을 일군 현 노인세대의 절반 가량이 빈곤한 사회, 생활고로 인한 자살이 반복되는 사회는 정의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본을 결여한 사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아직 근대적인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진단이 아니었나 싶다. 야만의 상태라는 진단은 근대화를 통해, 계몽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내포한다. 그리고 시민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받아들인 국가를 통해 근대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즉, 민주화를 포함한 계몽을 통해, 국가가 시민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국가의 일로 받아들이게 되며, 이를 통해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함하는 것이다. 즉 ‘인권, 민주주의, 복지국가’라는 인류의 성취에 다가가고자 하는 희망이다.

최근에는 오랫동안 가졌던 이러한 희망이 지나치게 단선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복지국가로 다가가는 것은 우리 사회의 근대화, 그리고 국가권력의 계몽에 관한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는 ‘야만의 시대’라기보다는 새로운 계급질서가 공고화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의 첨단으로 향하고 있다. 최근 십여년 동안 자본과 노동 간 힘의 불균형은 물론, 노동을 더욱 다양하게 분할하고 위계화시켜 착취하는 시스템은 한국 자본주의에서 더욱 공고한 질서로 자리잡았다. 최근에 드러난 한진해운, 롯데, 대우조선 등의 비도덕적 행태는 이 질서가 어떠한 변칙적인 요소를 통해 지속성을 갖는지를 일부 보여준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어리거나 고령이라는 이유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다른 국적을 가졌다는 이유로 위험한 일을 전담하고 낮은 임금을 감수하는 것은, 백년 전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 사이의 벽은 더 높아지고 계층 이동의 기회는 줄어들었다. 이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상과 충돌한다. 또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조합에 대한 전망을 어둡게 만든다.

문제는 국가다. 국가에 대한 꽤 오래된 기대에 따르면 점점 더 심해지는 불평등에 대해 국가는 적극적인 소득재분배를 수행하고, 삶의 조건을 인간화시키는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게 된다. 국가가 복지를 통해 불평등에 맞설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현실에서 국가의 일은 첨단의 불평등한 질서를 도입하고 공고하게 하는 데, 그리고 이에 대한 저항을 막는 데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국가는 노동을 더욱 다양하게 분할하고, 시민의 연대와 정치 참여를 억압하는 데 역량을 더욱 집중하고 있다. 파견제 등 다양한 불안정한 노동을 조장하는 노동개혁 추진,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에 대한 비정상적인 오랜 구속과 구형, 참여연대 압수수색, 세월호 특조위원회 업부마비 그리고 오랫동안 다방면에 걸쳐 이루어진 언론통제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일’은 사회의 통제와 관리에 온통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할 수 있다. 지금 국가는 우리 사회가 껍데기뿐인 민주주의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의 실종과 복지국가 발전의 지체는 함께 간다. 지금 국가의 역할에서 우선 순위는 국민의 복지에 있는 것 같지 않다. 복지예산은 늘었지만, 국가의 복지 책임과 한국 복지의 공공성은 그에 비례하여 늘어나지 않았다. 일례로 국가의 보육비 지원은 늘었지만 보육의 공적 책임성이 늘었다고 보기 어렵다. 국공립시설 대기줄은 여전히 길며, 시장의 거래 대상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이제 7월부터 시작된 맞춤형 보육은 이러한 소유구조 변화와 공공성 실현보다는 비용투입의 효율성에 정책 초점을 둔, 정부와 민간보육시설의 어중간한 타협의 결과물이 되어 버렸다. 새로운 보육정책에 대한 논란은 무성했지만 국가의 책임성이나 보육의 질 진전, 즉 계층을 불문한 모든 아이에 대한 평등한 돌봄도, 서비스 질의 획기적인 제고도 기대하기 어렵다. 노인요양, 의료, 재활, 노후소득보장 등 다른 복지 분야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기초연금 인상 이후에도 여전히 노인의 절반 가량은 빈곤하다. 국가의 퇴보는 그 자체로 국가의 전략으로 일컬어진다.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으면, 비판받을 일도 적어진다.

어떻게 인간적인 사회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문제는 국가지만 이는 국가에 대한 계몽, 혹은 다른 권력으로의 대체만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국가가 불평등의 질서를 조성하고 민주주의를 무화시키는 시대에, 다른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가와 시민의 관계에 본질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시민은 그저 투표권을 행사하고 복지급여를 받는 대상이 아니며, 저항하는 실천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 복지국가 전망은 권력에 기대어 사회를 통제하고 관리하려고 하는 자들이 아니라 결국 연대하고 저항하는 자들에게 달려 있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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