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나라를 이끌 선장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지난달 24일, 영국의 유럽연합(EU) 잔류 여부를 놓고 시행된 국민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총리직 사퇴를 선언했다. ‘영국의 EU 탈퇴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나섰던 장본인 캐머런 총리는 2020년으로 예정된 총리 임기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영국에 엄청난 후폭풍을 안기며 조기 퇴진하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보수당 재집권 위해 브렉시트 카드 꺼냈다가…
캐머런 총리가 브렉시트 국민투표 안건을 본격적으로 꺼낸 것은 2013년 1월. 당시 집권 보수당은 자유민주당과 연정 구성을 한 상태였다. 캐머런 총리는 “EU 내에서 영국의 지위와 권한을 명확히 하는 재협상을 벌일 것이며, 협상 내용을 토대로 2017년까지 EU 탈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2015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 그해 말에 투표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이 발언이 EU에 회의적인 보수당 지지자들의 결집을 부를 것이며 EU에 대한 입장이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야당 노동당을 압박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노동당 수뇌부는 EU 탈퇴에 내심 부정적이었다.
가디언은 “캐머런 총리가 당내 의견을 도출하고 갈등을 봉합하는 데 있어 쉬워 보이는 편의주의를 택한 것”이라고 평가하며 “캐머런 총리가 연정 파트너였던 친EU 성향의 자유민주당이 국민투표안 자체를 거부해주리라 확신했는지도 모르지만, 결국 자유민주당은 선거를 앞두고 보수당과 갈라섰다”고 지적했다.
결국 지난해 5월 치러진 총선에서 보수당은 승리해 단독 정부를 구성했고 캐머런 총리도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총리 관저로 돌아온 캐머런 총리가 브렉시트 투표를 유야무야 할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유입되는 난민 문제와 난민을 더 받아들이라는 EU의 압박은 경기침체, 긴축정책으로 어려운 경제에 부담이 됐다. 캐머런 총리는 지난 겨울 올해 6월 23일로 국민투표 날짜를 정해 놓고, 자신은 EU 잔류를 호소했다. 그러나 EU 잔류파 하원의원 피살 사건까지 터지며 영국을 분열시켰던 ‘브렉시트’투표 결과는 탈퇴 51.9%, 잔류 48.1%.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결과였다.
서민 코스프레 불사했지만… 뼛속까지 ‘상류층’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누가 EU 탈퇴를 찬성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 중에서도 교육수준이 높은 엘리트와 상류층은 EU 잔류를, 침체를 겪는 탈공업화 지역과 교육수준이 낮은 노동계층은 EU 탈퇴를 지지했다는 분석이 있다. 브렉시트 찬성파는 캠페인 기간 내내 엘리트 진영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표 몰이를 했다. (기사보기)
EU 잔류를 호소했던 캐머런 총리야말로 브렉시트 찬성파가 겨냥한 바로 그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그는 왕족 후손인 증권 중개인의 아들로 태어나 이튼 스쿨을 나왔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학위를 따는 등 전형적인 영국 상류층의 교육을 받았다.
상류층 총리라는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캐머런 총리도 종종 ‘서민행보’에 나섰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4월 한 유권자 가정에서 열린 가든 바비큐 파티에 참석해 캐주얼한 셔츠를 입고 식사를 함께 했지만, 보통 손으로 들고 먹는 음식인 핫도그를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우아하게’ 썰어먹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돼 오히려 언론의 조롱을 받았다. 또 그해 8월에는 총리 가족이 포르투갈 휴양지로 여름 휴가를 떠나면서 편도 약 25만원짜리 유럽 저가 항공사의 일반석을 타고 가는 모습이 다른 승객에 의해 포착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브렉시트 찬성파의 수장으로 탈퇴 투표를 독려한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도 사실은 캐머런 총리와 같은 이튼 스쿨, 옥스포드 출신의 엘리트라는 것이다.
독이 든 성배 ‘포스트 캐머런’에는 누가?
준비되지 않은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영국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안긴 캐머런 총리는 마지막 순간에 브렉시트 찬성파들에게 한 방을 날렸다. 총리직 사임을 발표하며 리스본 조약 50조(EU 탈퇴를 공식화하는 조약으로 해당 정부가 발동을 선언해야 적용되며 선언 시점을 기점으로 2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탈퇴 처리된다)의 발동을 후임 총리의 몫으로 넘긴 것이다.
이제 보수당의 대표는 영국의 총리로써 EU와 힘겨운 탈퇴 논의를 하면서 분열된 민심을 수습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떠안게 됐다. 그러나 캐머런 총리의 사퇴 선언 이후 보수당은 말 그대로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다.
원래 캐머런 총리의 후계자 자리의 가장 강력한 후보는 브렉시트 지지운동을 전면에서 이끈 보리슨 존슨(52) 전 런던시장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난달 30일 돌연 보수당 대표경선 불출마를 선언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의 불출마 선언 몇 시간 전에는 존슨 전 시장의 오른팔이었던 마이클 고브(49) 법무장관의 깜짝 경선 참여 발표 선언이 있었다. 고브 장관은 “보리스가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팀을 단결시키고 당과 나라를 이끌 능력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황당한 국면 전환이지만 전조는 있었다. 영국 언론들은 캐머런 총리의 ‘절친’으로, 원래 EU 잔류파였던 존슨 전 시장이 고브 장관의 설득으로 EU 탈퇴 진영에 넘어갔다고 분석한다. 브렉시트 찬성파는 직설적인 언변과 강한 추진력으로 인기가 높은 존슨 전 시장을 내세워 탈퇴 캠페인을 진행했으나 “EU 분담금을 아껴서 건강보험에 투입하겠다” 등 국민투표 이후 캠페인 기간 동안 내 놨던 약속들을 뒤집으면서 “사기극으로 영국을 분열시켰다”는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보수당 내에서도 브렉시트 반대파를 중심으로 존슨 전 시장이 총리가 되는 걸 막아야 한다는 ‘스톱 보리스’ 움직임이 가시화됐고 일부 브렉시트 찬성파도 이에 가세했다.
이러다 보니 존슨 전 시장의 갑작스런 낙마는 국민들에게 ‘고브 장관에게 배신당했다’ 또는 ‘일 벌려놓고 수습할 수 없으니 도망쳤다’로 해석되는 상황이다.
현재 보수당 대표 경선의 가장 유력한 후보는 EU 잔류파로 2010년부터 재임한 테레사 메이 내무장관이다. 메이 장관은 지난달 30일 출마를 선언하며 “브렉시트는 브렉시트를 뜻한다”며 EU탈퇴를 진행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캐머런 총리가 촉발한 브렉시트는 이제 본격적인 시작을 앞두고 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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