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에 연이어 취직했지만 이내 그만뒀다. 정년이 보장된다는 중견 중소기업에도 들어갔지만 2년여 만에 사표를 썼다. 장사를 하고 싶어서였다. 맞벌이도 아닌데 어린 애는 어떻게 키우겠냐며 다들 말렸다. 바닥부터 배우겠다는 생각에 야채가게에서 월급 30만원을 받으며 수습사원으로 일했다. 큰돈은 못 벌어도 능력을 인정받으며 신나게 일할 수 있었다. 장사를 시작한 지 8년 만에 서울 강남 한복판에 과일가게를 차렸다. 문을 연 지 2년 만에 물난리가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게 바로 옆에서 대규모 공사가 시작했다. 두 아이와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할 30대 후반의 가장에게 남은 건 1억5,000만원의 빚과 낡은 트럭 한 대뿐이었다.
연간 매출이 80억원에 달하는 ‘국가대표 과일촌’을 이끄는 배성기(42) 대표의 인생 역정은 한 편의 드라마다. 국가대표 과일촌은 과일 물류센터를 겸한 트럭장사 사관학교로 이곳에서 장사를 배운 트럭장사꾼의 자립을 돕고 과일가게 운영을 지원한다. 사관학교의 성격이 강해서인지 배 대표는 동료들에게 ‘배감독’이라고 불린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사채를 트럭 한 대로 3년 만에 정리하고 자신만의 회사를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29일 경기 광명시 국가대표 과일촌 제2물류센터에서 만난 배감독은 “정직과 성실”이라고 답했다.
트럭 장사 1년 만에 빚을 갚기까지 배감독은 1년 365일 하루 20시간 이상 장사에 매달렸다. 채권추심원을 피해 새벽에 나가 한여름 뙤약볕과 장맛비, 비바람, 함박눈 속에서 장사하다 다시 새벽에 들어왔다. 단속반에 걸려 벌금을 내는 것도 일상이었다. “내가 잘못 살아서 대가를 치르는 거로 생각했습니다. 나를 배신한 사람을 탓하고 홍수를 탓해봐야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더군요. 나부터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좋아하던 술도 끊고 평생 친구 몇 명 빼곤 인간관계도 대부분 정리했다.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다가갔다. 물건이 아니라 ‘말’을 먼저 팔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을 통한 소통이 먼저라고 생각해서였다. 확성기도 간이의자도 쓰지 않는 이유다. 어느 연령대가 무엇을 많이 사는지, 언제 어디가 장사가 잘 되는지, 시기마다 잘 팔리는 건 무엇인지, 품질 좋은 과일은 어떻게 구해서 언제 팔아야 하는지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하루에 1,000만원이 넘는 매출을 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제 번듯하게 폼 내며 살 만도 하지만 배감독에겐 희로애락을 함께한 트럭 말곤 아직 차가 없다. 집도 없어 어머니 집에 얹혀산다. 모이는 돈은 오프라인 매장을 새로 계약하는 데 들어간다. 과일가게든 트럭이든 수입이 전부 장사하는 사람에게 돌아가니 배감독에게 큰돈이 생기는 일은 아니다. 그는 “함께 일하는 우리 식구들이 잘됐으면 좋겠다”며 “힘들 때 아내의 소원이었던 의료보험, 국민연금, 실손의료보험료를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배감독은 지인의 부탁으로 우연히 트럭장사 교육을 시작했다. 절망의 끝에서 생을 마감하려다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고 자신에게 전화했던 사람을 가르친 후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이 희망을 찾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아예 사관학교를 차렸다. “까다롭게 면접을 해서 한 달에 최대 4명만 받습니다. 이분들에게 장사치가 아니라 장사꾼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장사로 남에게 상처를 주고 몸이든 마음이든 다치게 하면 장사치에 불과한 겁니다. 인성을 갖추는 게 우선이죠. 정직하고 성실해야 합니다. 이분들 돈을 벌게 하면 자연히 저도 돈을 벌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실패와 재기의 인생사를 차곡차곡 블로그에 풀어내 왔던 배감독은 최근 이를 ‘국가대표 트럭장사꾼’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장사의 잔기술을 되도록 담지 않으려 했다”는 배감독의 말처럼 돈 버는 비법보다는 길바닥 위에서 얻은 인생의 철학이 주로 쓰여 있다. “제게 ‘페일(fail)’의 뜻은 실패가 아니라 ‘다시 하라’입니다.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 오는 신호라고 생각하고 꿈을 향해 열심히 뛰어가야죠. 제 꿈 중 하나는 트럭장사하는 분들을 위해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돈이 없어 아들이 교육을 못 받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으니까요. 꿈이 또 있다면 매장을 100개까지 늘리는 겁니다. 그때쯤 되면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이제 6개니까 한참 멀었죠.”
고경석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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