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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막판뒤집기

입력
2016.06.2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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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의 반전, 연극에서 이거 빠지면 싱겁다. 쭉 해온 이야기랑 전혀 다른 맥락이 생겼을 때 환기가 되면서 보는 재미가 더해진다. 후반부에 믿었던 수하가 주인공의 뒤통수에 권총을 들이대고, 몰랐던 그 무엇을 알게 되고, 알고 보니 연인은 같은 핏줄이고, 부자가 도리어 뒷돈을 바라고. 이런! 요새 나오는 뉴스랑 비슷하군.

대학 1학년 때 친한 친구가 과체육대회에서 조교랑 씨름으로 붙었다. 1대1 상황. 조교는 첫판을 이기고 둘째 판에 지자 부아가 동했던지 정색을 한 채 샅바 싸움을 꽤 했다. 시작하자마자 재빠르게 한쪽 샅바를 놓더니 친구의 목 쪽을 누르고 등허리께의 샅바를 잡았다. 내 친구를 그대로 눌러버리려고 단단히 작심했다. 친구는 등이 눌려서 모래판에 그대로 깔릴 판. 그때. 친구가 왼 다리를 조교의 가랑이에 끼우는가 싶었다. 순간. 뒤집혔다. 아름다웠다. 막판 뒤집기. 씨름의 매력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대천에서 올라온 내 친구는 담박에 스타덤. 그날의 감동이란.

연습실에서 쭉연습 하다가 극장에 들어가면 테크니컬 리허설을 한다. 빛을 맞추고 소품을 제대로 써보고 기계장치도 타이밍에 맞춰서 구동하고 음향의 볼륨도 체크한다. 그런데 그때 가서 갑자기 뒤집고 싶어지는 게 나온다. 꼭 나온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면 그때 가서야 보이는 그 무엇이 있다. 희한하다. 너무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하는 나도 놀란다. 그런데 그것은 치명적인 매력이고 유혹이라서 거부하기가 힘들다. 사실 유지해오던 그 무엇을 뒤집는 일은 그동안 준비해온 스태프나 배우들에게 꽤 커다란 무례다. 조심하지 않으면 큰 싸움도 나고 급기야는 연극을 망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아닌 것은 아닌 거다.

옛날 사장님도 그랬다. 한 달 반을 열 올리며 준비한 피티가 내일모레인데 내도록 쳐다도 보지 않으시다 느닷없이 약주 한 잔을 하고 등장하신다. “아닌 거 같아.” 해오던 방향과 정반대로 콘셉트를 뒤집는다. 팔짝 뛸 노릇. 팀원들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치킨집에서 1,000㏄ 잔을 아령처럼 올려내려 하면서 뒷담화로 밤을 새운다. 그런데 그 선택이 늘 통하더라는 말씀. 그 때 가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홍도를 할 때. 최종리허설을 보다가 놀랐다. 재미가 없는 거다. 조연출 두 명에게 차례로 물었다. “재미가 있냐.” 말을 안 한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재미가 없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둘 다가 그랬다. 내일 3시가 공연인데. 10시 반인가에 분장실에 배우들과 모였다. 진심을 다해서 사과를 했다. 대본을 자르고 여기와 저기를 이래저래 바꾸겠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때 분장실을 휘감던 살벌한 냉기와 불안감을. 하지만 끝내 바꾸었다. 배우들은 그다음 날 아침 열 시부터 부랴부랴 새로 만든 대본으로 연습하고 동선도 바꾸었다. 전쟁을 치르듯이 첫 공연이 올라갔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부분적으로는 괜찮아도 막상 붙여놓고 보면 아닐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다시 붙이는 수 말고 다른 대책이 없다.

이번에도 여지없었다. 멋지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장면이 문제였다. 그 장면 때문에 연극이 가닥을 못 찾고 꼬였다. 근사하니까 모두가 아무런 말도 못했다. 십 분을 쉬고 나서 그랬다. “걷어냅시다.” 처음부터 다시 갔다. 두 시간 가까이 만들어온 큐시트를 가차 없이 날려버린 셈. 그제야 드라마가 풀렸다. 뒤집어야 할 때라면 뒤집어야 한다. 그것이 가짜라면 화려하고 근사해 보여도 아낌없이 쳐내야 한다. 한 군데만 좋아 보이면 전체가 망가진다. 늦었더라도 용단을 늦출 까닭은 전혀 없다. 믿었던 그 무엇이 언제든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연극이 완성된다. 연출가의 최종 디렉션도 막판 뒤집기와 닮았다. 지금까지 했던 디렉션을 모두 잊으시고 즐겨주시라.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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