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남아시아 출신 정착지
인종주의 영향 강할 듯 했지만
“일자리 줄고 국가의료서비스 위기
탈퇴 측이 더 설득력 있었던 것”
‘늦게 온 이민자 혐오’도 무시 못해
영국 런던의 33개 선거 지역구(borough, 보로) 대부분은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잔류로 의사를 표시했다. 탈퇴에 표를 던진 지역구는 5개에 불과하다. 의외로 탈퇴가 우세한 지역은 비백인 영국인과 외국인이 많이 정착한 곳이었다.
도심에서 지하철을 타고 30분 정도 가면 도착하는 런던 동쪽 바킹ㆍ대거넘구. 여기도 이주민들이 많이 정착한 곳이지만 투표결과는 탈퇴가 62.4%로 잔류(37.6%)를 압도했다. 소수인종 거주자가 많은 지역에서 인종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브렉시트 지지가 높은 것은 이상하게 보일 법하지만 이 지역 유권자들은 외려 어느 정도 이민 통제가 필요하고 주장했다. 나딤 바파리(47)는 “잔류 진영은 기득권층 정치인들의 주장일 뿐”이라며 “일자리가 줄고 국가의료서비스(NHS)가 위기에 빠졌다는 탈퇴측 주장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바킹ㆍ대거넘 지역에 정착한 비백인들은 주로 아프리카계 흑인과 남아시아인들이다. 여기에 최근 10년간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급증했다. 2011년 인구총조사에 따르면 바킹ㆍ대거넘의 백인 영국인 인구 비중은 80.86%에서 49.46%까지 떨어졌다. 일간지 더 타임스가 인용한 옥스퍼드대 이민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바킹은 외국인 인구 비중이 2001~11년 10년간 205% 증가한 곳이다.
세계화와 인종평등주의 같은 자유주의 담론은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무력했다. 자신을 마무드라 소개한 한 상점 점원은 “나는 잔류 지지지만 부모님은 확고한 브렉시트 지지자였다”며 “알고 지내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탈퇴 목소리가 훨씬 크다”고 전했다. 알제리계 칼럼니스트 이만 암라니는 일간지 가디언 기고문에 “소수인종들 사이에서 탈퇴 지지가 유행하는 것은 ‘영국인’이 되고 싶은 열망 때문이 아닐까”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마무드는 “인종주의는 싫지만 당장 취업난에 허덕이는 이들이 분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했다. 그는 “극단적 목소리를 빼고 보면 탈퇴도 잔류도 합리적 이유가 있었다. 탈퇴가 더 설득력 있어서 이긴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바킹만의 현상이 아니다. 영국선거연구(British Election Study)는 소수인종의 3분의 1이 브렉시트를 지지한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다만 기존의 아프리카ㆍ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새로 등장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 이민자들을 경계한 것이 인종혐오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탈퇴진영 정치권과 언론도 이민자 간 반목을 부추겼다. 더 선 등의 대중적인 일간지는 '착한 이민자 대 나쁜 이민자' 프레임을 발동했다. 먼저 정착한 이민자들은 영국을 위해 성실하게 일했는데 뒤늦게 온 가난한 이민자들이 게으르고 복지혜택과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인종차별 논란을 일으킨 영국독립당(UKIP)의 홍보 포스터 '브레이킹 포인트'가 노골적으로 중동권 소수인종을 겨냥했지만 정작 브렉시트 후 벌어진 테러리즘의 1차 목표는 폴란드인이었다. 케임브리지셔 헌팅던의 폴란드 공동체에는 “EU로 돌아가라”는 투서가 날아들었고 런던 서부 해머스미스의 폴란드사회문화원 벽에도 누군가가 인종주의적 낙서를 남겨 경찰이 범인 추적에 나섰다. 투표 이전 서부 런던에서 만난 한 잔류진영 운동가는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가 브렉시트에 찬성한다며 내세운 이유가 불가리아인들의 도둑질이 극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며 “탈퇴 진영이 승리하면 영국 내 만연한 무슬림 혐오뿐 아니라 모든 소수인종을 향한 혐오가 더욱 확산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런던=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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