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뿌리내려져 있는 한국의 아름다운 문학작품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겠습니다.”
드버니아 토레이(50ㆍ사진) 미국 유타대 교수는 지난 25일 전주대 교정에서“자연과 어울려 아기자기한 멋을 지녔던 시골마을에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고, 정겨운 흙 길이 시멘트로 뒤덮이는가 하면, 중소도시는 빌딩ㆍ편의점 등이 일률적으로 들어서 지역적 특색을 잃는 것 같다”며 “주거환경과 생활의 편리 측면은 이해하지만, 시골의 독특한 풍광과 고유의 정취마저 사라지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날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가 주최한 ‘근현대 동아시아 식민통치와 지역공동체의 변화’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방문한 토레이 교수의 한국이름은 대명숙(戴明淑)이다. 한국 교수들이 감탄할 정도로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갖춘 그는 19세까지 강원도 두메산골의 ‘금발머리 소녀’였다. 아버지가 바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미국인 사제’로 널리 알려진 대천덕(미국명 루벤 아처 토레이ㆍ1918~2002) 성공회 신부이기 때문이다.
2002년 한국에서 운명한 대천덕 신부는 평양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뒤 39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10년 가까이 성공회대에 봉직했다. 이후 1965년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태백의 외딴 산골로 들어가‘예수원’을 설립, 산비탈을 개간해 한국의 대표적인 수도원 공동체를 키워냈다. 이 때 생활을 바탕으로‘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토지와 경제정의’등 10여권을 저서를 남겼다.
토레이 교수는“강원 삼척시 하장면 우리 동네는 서울에서 기차로 6시간, 읍에서 마을버스 1시간을 탄 뒤에 내려 다시 20분 이상을 걸어야 집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첩첩산중 이었다”며“마을에 전기가 들어 온 것도 초등학교 5학년 이었다”고 회상했다. 작은 산골 분교를 다니던 미국 소녀가 주목을 받은 것은 4학년 때, 졸업반 언니ㆍ오빠들의 서울 수학여행을 따라 갔다가 신문에‘두메산골의 미국소녀’라는 기사가 실리고, 한 달간 매일 10~20통의 편지가 전국에서 오면서 친구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1985년 태평양을 건넜다. 이후 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아 현재는 유타대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유대인인 남편도 같은 대학, 같은 과 교수다.
다음달 5일 미국으로 돌아가는 토레이 교수는“허생전과 양반전 처럼 사회 풍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고전소설이나 ‘무녀도’ ‘메밀꽃 필 무렵’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독특함과 깊이, 보편성을 함께 지닌 작품을 좋아한다”며“한국사랑을 한국문화를 세계에 소개하는 것을 통해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전주=박경우 기자 gw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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