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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은 죄가 없다

입력
2016.06.2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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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혁명 막차 올라탄 일본제국

공업용 막대한 소금 필요해져

1907년부터 한반도서 생산 시작

‘천년의 신비ㆍ조상의 지혜’는 허구

우리 소금은 불 때 만드는 자염

한국전쟁 뒤 산림훼손 막기 위해

겨우 이어온 자염 명맥 아예 끊어

염전노예 같은 소문 도는 현실

‘천일염 세계최고’ 논할 수 있을까

천일염은 1,000년을 이어온 민족의 신비일까. 아니면 가혹한 노동 위에 서 있는 신기루일 뿐일까. 게티이미지뱅크
천일염은 1,000년을 이어온 민족의 신비일까. 아니면 가혹한 노동 위에 서 있는 신기루일 뿐일까. 게티이미지뱅크

도대체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딱한 거짓말이 있다. 바로 공동체의 맹신이 낳은 거짓말이다.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덮어놓고 믿기에 맹신이다. 실제와 상황에 눈감은 음식 이야기는 음식만 망치지 않는다. 생각하는 법과 대화하는 법을 망가뜨린다. 그 악영향은 다음 세대에까지 미친다. 사실과 실제를 정직하게 대하는 사람, 현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는 사람은 적으로 내몰린다. 공동체의 적이 되지 않기 위해 맹신에 휩쓸리거나, 믿는 척하거나, 알아도 모르는 척할 때 악순환은 구제불능 상태가 된다.

신토불이는 답이 아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맹신이 낳은 대표적인 한국인의 거짓말, 불편하지만 꼭 한 번 짚어야 할 소금을 둘러싼 맹신과 거짓말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국산 천일염은 이 땅의 신비와 조상의 지혜로 이룬 세계 최고의 소금인가? 이른바 전문가란 사람들이 그렇다고 한다. 대중은 그 말을 덮어놓고 믿는다. 하지만 어떤 근거로 천일염을 치켜세우는지 물으면 묵묵부답, 답이 없다. 신토불이는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다. 천일염을 맹신하는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먹어온 소금의 역사, 소금 생산의 조건, 노동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다. 실제와 현실에 무지하고 또 무감각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금은 한국에서만 나는 물질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곳곳의 자연 조건에 따라 다양한 소금이 다양하게 생산되고 있다. 좋은 소금의 기준은 특정 성분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안전과 위생이 담보되고, 인간과 환경에 대한 존중이 깃든 먹을거리는 어느 공동체에서나 소중하다. 소금이 예외일 수 없다. 꼭 필요하고 소중하기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소금에는 주어진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한 공동체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소금 이야기는 이를 확인하면서 시작함이 옳다.

일본제국의 기획품, 한국 천일염

천일염. 이 땅에서 1907년에 시작됐으니 100살이 넘은 소금이다. 100년 동안 고맙게 잘 먹었다. 그러나 천년의 신비나 조상의 지혜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천일염 맹신자들은 이 연대기를 전혀 모른다.

한국인이 천일염을 먹기 전까지, 한반도 소금의 대종은 자염(煮鹽) 또는 화염(火鹽)이었다. 자염은 구웠다는 의미고, 화염은 불을 때서 얻었다는 얘기다. ‘화렴’이라는 곁말도 있다. 갯벌 흙을 일구어 만든다는 점에서는 토염(土鹽)이라고도 했다. “달인 소금” “졸인 소금”이라는 말도 있다. 일본에서는 달일 전(煎), 볶을 오(熬)를 써 전오염(煎熬鹽)이라 했다. 어떤 말이든 사람의 힘으로 농도 짙은 짠물을 모으고, 그 물에 불을 때 소금 결정을 받는 과정이 깃든 말이다.

한국 천일염 생산은 산업혁명의 막차를 탄 일본제국이 기획했다. 화학공업에 막대한 소금이 들기 때문이다. 일제는 1895년 대만을 집어삼키면서 대만을 통해 천일염 제법을 배운다. 1905년 한국(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서는 한반도에 천일염전을 만들 구상을 시작했다. 일제의 기획과 한국의 재무 부서인 탁지부의 호응이 동력이 되어 1907년 인천 주안과 부산 용호동에서 천일염 시험이 이루어졌다. 1908년에는 평안도 광량만으로 천일염전이 확대됐다. 1907년에서 1944년까지 일제가 한반도에 조성한 천일염전의 면적은 대략 6,090정보(1정보는 3,000평)에 이른다. 한국 천일염의 역사는 그 연대기가 아주 분명하다.

염조지인. 19세기 풍속화가 김준근이 그린 소금 굽는 모습. 불로 끓여가며 소금을 얻어내는 풍경이다. 오스트리아 빈 민족학박물관 소장.
염조지인. 19세기 풍속화가 김준근이 그린 소금 굽는 모습. 불로 끓여가며 소금을 얻어내는 풍경이다. 오스트리아 빈 민족학박물관 소장.

100년 전 문제도 노동

천일염 맹신자들은 소금의 역사가 노동의 역사라는 사실에 절망적일 정도로 관심이 없다. 100년 전 그때, 막 생긴 천일염전에서 염부 노릇을 하려는 한국인은 없었다. 염부의 일이란, 당시 한국인이 보기에는 대대로 소금만 굽다 죽는 불쌍한 사람들의 일, 노비의 일, 군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떠맡은 수군의 일이었다. 일하려는 사람이 없다? 오늘날과 똑같다. 처음에는 산동에서 수천 명의 중국인 노동자를 수입해 썼다. 이들이 기반을 닦은 뒤에야 한국인들이 천일염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대형 염전의 소유자였던 한국 탁지부는 임금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이주 노동자들은 폭발했다.

1910년 4월 광량만염전에서 일하던 중국 노동자는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쟁의를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6월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편을 갈라 투석전까지 벌였다. 결국 1910년 6월 20일 854명의 노동자들이 배를 타고 다시 고향 산동으로 돌아갔다. 이 가운데 극소수가 농업이민으로 정착한다. 김동인 소설 ‘감자’에 나오는 배추밭은 아마 산동 출신 염부의 후예가 가꾼 밭이었을 것이다.

그 쟁의의 세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주모자 19인의 체포 소식만큼은 분명하게 남아 있다. 이주 노동자 854명이 “퉷, 일 안 해!” 하고 돌아가는 판인데, 당국은 쟁의의 주모자만큼은 확실히 체포했다. 100년 전 염전의 노동이 이랬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천일염전은 조선인 노동자의 차지가 됐다. 농토 없는 농민, 광산의 일당보다 싼 일당이라도 받고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천일염전에 모여들었다.

광량만 염전에서 벌어진 한국인 노동자와 청국인 노동자의 충돌을 보도한 황성신문 1910년 6월 5일자 기사. 천일염 신화는 염부들의 가혹한 노동 실태를 가려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광량만 염전에서 벌어진 한국인 노동자와 청국인 노동자의 충돌을 보도한 황성신문 1910년 6월 5일자 기사. 천일염 신화는 염부들의 가혹한 노동 실태를 가려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대한민국, 자염 생산을 끝내다

자염 생산도 고달프긴 마찬가지였다. 소금을 굽자면 많은 연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국가는 연료를 지급하지 않고 소금을 굽게 했다. 연료 조달은 노동자에게 떠넘겼다. 소금 노동자들은 늘 연료가 아쉬웠다. 이들이 연료를 구하기 위해 남의 산에 들어갔다가 산주한테 곤욕을 당했다. 국유림에 들어갔다가는 고을 원님이 잡아 죽였다. 소금 노동자가 당한 곤경과 억울한 죽음은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차고 넘친다. 싸구려 노동력을 얼마든지 쓸 수 있고, 연료도 들지 않는 천일염은 금세 자염을 밀어내고 한반도를 석권했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정부 또한 산림 훼손을 막기 위해 자염 생산에 간섭했다. 정부는 1960년 ‘염업 임시조치법’을 공포하면서 그나마 조금 남아 있던 자염 생산을 아예 끊어버렸다. 이후 소금을 둘러싼 한국인의 상상력은 뻔해졌다. 소금이란 바닷가 염전에서 나는 천일염으로 고정됐다. 자염의 역사도 천일염의 역사도 신비에 덮였다. 그러다 최근 자염 생산도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천일염에 이어 자염에도 ‘신비’나 ‘조상의 지혜’를 가져다 붙인다. 그러면서도 한국 소금의 역사에서 천일염 등장과 자염 퇴장의 의미를 돌아본 적은 없다. 신비 타령, 조상 타령은 무지나 무감각의 다른 얼굴인지도 모른다. 역사를 모르니 교훈도 없다.

소금의 위생과 품질을 논해야

천일염은 한국 역사 최근 100년의 산물이자 엄중한 현실의 산물이다. 우리는 맹신에 홀려 그동안 우리가 정작 따져 보아야 할 소금 이야기는 놓치고 있었다. 안전과 위생에 대한 정당한 요구, 새 조리법과 새 음식 등장에 따른 다양한 수요 그리고 품질의 국제적 비교라는 상황에 아직 눈을 못 떴다. 소금 알갱이 한두 톨로 맛을 증폭하는 음식이 좋은 소금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소금이 가정과 음식점과 식품 산업 등 다양한 소비자의 선택을 받으려면 구체적인 세목에 눈떠야 한다.

안전과 위생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소금 결정의 크기, 모양, 빛깔, 수분 등에 대한 정밀하고 세련된 접근이 필요하다. 선진 식염 산업은 오늘날 주사위, 다면체, 다공질입방체, 비늘, 공, 막대기에 이르는 다양한 결정의 형태에 파고들어 이를 품질 구현의 발판으로 삼고 있다. 연암 박지원이 1757년에 쓴 ‘민옹전(閔翁傳)’만 봐도 “수정 같은 소금(水晶鹽)”과 “싸래기 같은 소금(素金鹽)”이 등장한다. 결정 형태를 구분한 것이다. 한국에서 소금 전문가 행세를 해온 사람들 가운데 현실과 세목에 대한 감각을 지닌 사람이 있기는 한가.

바닷가에 염전이 조성되었다면 경관산업은 기본이다. 그러나 노동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경관산업은 없다. “염전노예”와 같은 흉흉한 소문 속에서 경관산업이 가능할까. 전문가라면 염전의 지주소작제에 파고들 궁리부터 해야 한다.

“소금은 한국 천일염이 세계 최고!”라는 선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사실과 현황을 직시하자. 1,000년을 이어온 것은 신비가 아니다. 소금 생산에 따른 환경과 노동, 적정 생산 비용, 적정 가격, 지속 가능한 소금 생산의 조건을 둘러싼 문제가 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소금은 죄가 없다.

고영 (음식 문헌 연구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천일염, 무식한 몇몇의 말만 듣고 시혜성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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