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외과 인턴으로 근무할 때의 이야기이다. 잘 알려진 대로, 인턴은 그 과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모든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 조직의 막내란 전부 그렇듯이 일을 잘해도 티는 그다지 나지 않지만, 잘 못 한 자리는 아주 티가 나는 법이다. 그래서 온종일 눈치를 보고 있다가 윗사람이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게, 잽싸게 별것 아닌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인턴의 주 업무다. 이게 말이 그렇지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꽤 고충 있는 직업이다.
그러한 외과 인턴의 업무 중에는 수술방에서 배꼽을 닦는 일이 있었다. 복부 수술 시에 의사들은 환자를 마취하고, 멸균 장갑을 끼고 뱃가죽을 통째로 소독한다. 그런데 망망한 사람의 뱃가죽에 움푹 들어간 구멍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배꼽이다. 이 배꼽부터 시작해 동심원을 그리며 소독약을 뱃가죽에 바르는 게 외과적인 복부 소독 순서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 중에 배꼽을 일부러 신경 써서 닦는 사람은 많지 않으므로, 가끔 때가 끼거나 지저분한 배꼽이 있다. 그걸 닦지 않은 채로 소독을 시작하면 온 뱃가죽에 배꼽 때를 문지르는 꼴이 된다. 그래서 외과 의사가 소독을 시작하기 전에 면봉으로 배꼽을 닦아 주는 것이 인턴의 일이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외과 인턴은 수술 시작 전에 비눗물에 적신 면봉 두 개와 마른 면봉 두 개를 들고 대기한다. 마취과에서 마취가 다 되었다는 사인을 받자마자 득달같이 비눗물에 적신 면봉으로 배꼽을 냅다 후비고, 흡족하게 세척되었으면 마른 면봉으로 적셔놓은 배꼽을 후빈다. 뭐, 의사의 일이라기보단 세신사의 일에 가깝지만, 도제식 교육 안에서 풋내기 의사의 일이란 워낙 이런 것들이다.
그래서 그날도 나는 환자의 복부를 감상하며 면봉 네 개를 준비해 들고 환자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존경하는 치프(병원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레지던트를 일컫는 말) 선생님이 헐렁한 수술복 자락을 휘날리며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수술방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어젯밤에 있었던 화려한 회식과 치프 선생님의 활약상을 떠올리며 여전히 결연한 표정으로 배꼽을 후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환자를 마취하는 동안, 존경하는 치프 선생님은 수술방을 어슬렁거리며 여기저기 농을 던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치프 선생님은 면봉을 집어 드셨다. 그래서 잽싼 인턴이었던 나는 생각했다. ‘치프 선생님께서 손수 배꼽을 후빌 요량이시구나. 오늘은 숙련된 외과적 배꼽 닦이를 감상할 수 있겠군.’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도 날래게 손에 들고 있던 면봉을 쓰레기통으로 던지고, 뒷 동작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자 치프 선생님은 면봉을 칼잡이처럼 꼬나쥐고 환자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제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존경하는 치프 선생님은 면봉을 자기 귀에 쏙 넣어 후비기 시작했다. “아오, 시원하네.” 순간 나는 황망히 치프 선생님을 보고 있었다. 때마침 마취과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언질을 보냈다. “환자 마취되었습니다.”
치프 선생님은 오른손으로 오른쪽 귀를 후비면서, 동시에 오른 눈과 오른 얼굴을 찡그린 채로 황망한 표정의 나를 보더니 말했다.
“인턴 선생. 마취되었다는데 뭐 하고 있나. 술이 아직 덜 깼나?”
“아, 아닙니다. 바로 닦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잽싸게 면봉을 다시 가져다가 배꼽을 닦았다. 이 치프 선생님은 제법 빠릿빠릿한 인턴이 그날따라 왜 거기 총기를 잃고 멍하게 서 있었는지 아직도 연유를 모를 것이다. 아니면 이 일 자체가 너무 사소해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 돌아보면 이 업계는 절박하고 끔찍한 이야기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는 이야기도 있는 것이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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