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영화 할 수 있어서 너무 황홀했죠.”
산 속에서 구르고 뛰고 또 뛴다. 살기 위해서 그리고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서. 백발이 서린 60대 노인을 떠올린다면 어떤가. 손에 엽총을 들고 산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건장한 사내 7명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고 한 판 몸싸움도 펼친다.
이 험난한 연기를 국민배우 안성기(64)가 해냈다. 그는 영화 ‘사냥’(29일 개봉)에서 백발을 휘날리며 극중 그를 지칭하는 대사인 ‘람보’처럼 죽기살기로 뛰어다니는 파격 변신을 감행했다.
24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안성기는 “‘사냥’ 시나리오를 봤을 때 너무 황홀했다”며 “내기 이런 액션영화를 할 수 있다니 설렘과 기대감이 컸다”고 말했다.
영화에서 안성기는 대규모 탄광 붕괴 사고에서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은 생존자 기성으로 나온다. 그러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리며 산에 집착하던 기성은 우연히 7명의 엽사들을 목격하게 되면서 살인 사건에 휘말린다. 사고로 잃은 동료의 딸 양순이(한예리)를 구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기까지 한다.
“뛰는 건 너무 자신 있는 부분이라 저한테 전혀 고통이나 힘든 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기성이라는 캐릭터를 만나 행복하게 뛰었다는 게 의미가 있어요. 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고마움에 행복하게 뛰었습니다.”
7세 때(그의 말을 빌리면 “만 5세 때”) 연기를 시작해 올해로 무려 60여년의 연기 경력을 지닌 안성기는 영화 내내 탄탄하고 날렵한 몸을 드러낸다. “지난 40년 간 꾸준히 조깅과 웨이트 운동을 조금씩 해왔다”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뛰는 것조차 힘들었을 테고 ‘왜 이런 시나리오를 (나에게) 줬을까?’ 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준비는 잘 되어 있었기에 시나리오를 준 제작진에게 너무 고마웠죠.”
안성기는 영화 속에서 첫 등장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는 “산에 그만 가라”며 찾아온 딸(신동미)과 티격태격 하는 장면에서 민소매 옷을 입고도 군살 없는 몸과 잔근육을 보여준다. 외모는 60대지만 체격만큼은 20~30대 청년 못지 않게 탄탄했다. 민소매 연기는 의도됐다. “엽사들과 싸움을 벌어야 하는 노인인데 몸까지 노쇠하면 영화가 쉽게 끝나버릴 것 같잖아요. 그래서 첫 장면에 민소매 옷을 입고 노출을 한 겁니다.”
‘산 사나이’나 ‘람보’ 같은 날쌔고 탄탄한 힘을 보여줘야 하는 게 중요했다고 한다. 그는 “조진웅과도 붙었을 때 뭔가 다르겠구나 하는 걸 보여줘야 헸다”고 설명했다.
‘사냥’은 60여년 동안 150편의 작품을 소화한 그에게 가장 강인한 체력을 요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그 역시도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가장 격한 걸 했다”며 웃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선 해리슨 포드 등 나이 많은 배우들이 주연급으로 날랜 액션 장면을 찍곤 한다. 안성기도 할리우드를 부러워했다. “외국에서는 그런 영화 기획이 많다”는 그는 “우리는 기회가 적다. 나 역시 (‘사냥’을 통해) 연기 폭이 확장됐다”고 했다. 그는 “‘사냥’을 통해 영화 기획의 폭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노장 배우가 영화계에 던지는 바람이라 할 수 있다.
안성기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은 표현의 자유가 제약을 받던 시기였다. “내가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하며 고민을 수도 없이 했다고 한다. 그러다 1980년대 세상이 조금씩 변해가면서 그전에 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80년대 들어서는 멜로영화 쪽은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 대신 사회성이나 역사성, 현실참여가 되는 그런 영화들을 주고 선택했죠. 평생 영화를 해야 하는데 존경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죠. 영화나 배우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어요.”
그런 마음이 통한 것일까. 안성기는 국민배우로 불리며 후배들이 존경하는 배우로 손꼽힌다. 하지만 요즘 젊은 배우들처럼 영화 연출이나 제작에는 관심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예전부터 그런 생각은 없었다”는 그는 “그릇은 다르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로지 연기에 더 매진하고 싶다는 안성기. “생활의 달인처럼 수십년을 하면 도사같이 능력이 쌓인다고 하는데, 연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기한다는 게 노련할 수는 없죠. 그래서 연기라는 건 늘 설레지만 미숙합니다.” 연기는 백전노장에게도 풀기 어려운 숙제인가보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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