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 훈육소에서 이론교육
현장실습은 곧 실전
여성 첫 유공자회 지회장
“전쟁 중 아버지 임종 못 지켜”
“대신 유공자에게 더 잘할 것”
“어린 학도병들이 ‘누나 잘 있어’ 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치료를 받고 건강하게 돌아갔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박옥선(84)씨는 6ㆍ25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동생 뻘이었던 학도병들을 추억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1951년 국군간호사관학교에 들어가 휴전이 될 때까지 전장에서 군인들을 돌봤다. 학도병들을 처음 만난 건 소위 임관 뒤 제주도로 발령받은 1953년. 휴전회담이 진행 중이었지만 국군병원엔 환자가 줄지 않았다. 간호장교 두 명이 환자 500명을 돌볼 때도 있었다.
박씨는 서울 경기여고 재학 중 전쟁과 맞닥뜨렸다. 어머니와 손을 잡고 여름 교복을 맞추러 가던 평화로운 일요일, 별안간 하늘에서 ‘북에서 군인들이 밀려 내려오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전단이 뿌려졌다. 24일 서울 종로구 보훈회관에서 만난 박씨는 “한강다리가 폭파돼 아버지 목말을 타고 강을 건너면서 폭격으로 희생된 수많은 민간인을 목격했다”며 전쟁의 참상에 치를 떨었다.
이듬해 3월 국군간호사관학교가 문을 열자 박씨는 주저 없이 지원했다. 1기 모집 후 보름 만에2기 생도를 뽑을 만큼 간호인력이 턱없이 부족할 때였다. 무남독녀였던 박씨는 부모님과 상의 없이 몰래 입교 시험을 봤다. 세면도구와 속옷 몇 개만 챙겨 들고 집을 나선 그는 뒤늦게 소식을 듣고 배웅을 나온 아버지, 어머니와 기차역에서 눈물로 작별했다. 그 길이 마지막이었다. 부모님은 난리통에 돌아가셨다.
박씨는 천막으로 만들어진 임시 훈육소에서 이론 교육을 받았다. 현장실습은 곧 실전이었다. 서울 대구 철원 등 수많은 병원을 다녔다. 대구에서는 병실로 쓴 학교 교실이 모자라 운동장에 자리를 깔고 환자를 받기도 했다.
그는 당시 총알이 턱에서 볼을 관통해 실려 온 박모 중위를 여태껏 기억하고 있다. 죽을 사람 같으면 아예 치료할 엄두도 못 내던 때 어린 간호장교는 자신의 혈액까지 수혈해 가며 군인을 기어이 살려냈다. 박 중위는 몸이 회복하자 제주도로 발령받은 박씨를 따라 바다를 건널 정도로 돈독한 전우애를 나눴지만 이후 60년 간 연락이 끊겼다가 3년 전 극적으로 재회했다.
박씨는 2009년부터 여성 참전유공자 최초로 6ㆍ25참전유공자회 지회장(종로)을 맡고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싶어서다. 그는 이곳을 찾는 참전유공자들을 대할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린다. “전쟁 중 임종도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를 대신해 유공자들에게 더 잘하고 싶습니다. 국민들도 이 분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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