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인이 얼마 전에 요가를 하다가 허리를 다쳤다고 호소했다. 그런 얘기를 들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나는 대학에서 요가를 가르치고 있어 요가에 대한 대화를 자주 하게 된다. 프랑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요가와 친근하게 살았지만, 요가를 하다 다쳤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원래 요가라는 것은 경쟁적 운동과 달리 절대로 무리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을 다칠 위험성이 없다. 요가 후 상쾌하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게 정상이며 피곤하거나 어딘가 아프다면 가르치는 쪽이나 배우는 쪽에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 이런 사고가 발생하는가. 한국사람은 가르칠 때 요가를 평화스러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주의를 시켜도 별로 소용이 없다. 인간이란 몸에 밴 자기 문화를 쉽게 버릴 수 없으므로 늘 빨리 그리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해야 살아남는 경쟁사회에 길들여진 한국사람에게 천천히 요가 자세를 잡고 몸에 집중하고 길게 호흡을 하면서 한 자세를 한참 동안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속도를 낸다거나 자기 능력 이상으로 욕심부리는 요가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서서히 하는 것이 간단해 보여도 막상 해보면 어렵게 느껴진다. 평상시 자주 하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몸이 아프지도 않더라도 마음이 불안할 수도 있다. 평소 천천히 여유 있게 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늘 보다 빠르게 그리고 보다 많이 하려고 하는 욕심을 가지고 있어서, 요가 할 때 행동 방식을 바꾸고 싶어도 잘 안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요가는 욕심이 아니다. 반대로 요가는 욕망,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웰빙만 중시하고 철학적 목표를 무시하는 요가는 요가가 아니다. 요가는 건강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함을 몸과 마음속에 가져다줌으로써 사고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고요하지 못한 한국 현대사회에 요가가 필요하다.
요가를 가르칠 때 육체적인 면만을 중시한다면 스트레칭과 다를 바 없다. 엄밀하게 따지면 특정한 자세 달성을 위주로 하는 요가보다 마음을 비우는 스트레칭이 요가의 원천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원칙대로 무리하지 않게 몸의 한계를 넘어가지 않는 아사나(asanaㆍ요가동작)와 프라나야마(pranayamaㆍ호흡훈련)를 해야 하는 것은 경쟁이 심한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는 차분하고 명상적인 요가보다 핫요가 같은 근력이 필요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요가가 인기가 많다. 철학적 면이 아니라 육체적인 면에 주목을 둔단 말이다. 짧은 시간에 빨리 움직이면서 많은 여러 종류의 동작을 함으로써 빨리 땀을 흘리게 하기 때문에 핫요가가 인기가 많은 것 같다. 특히 살을 빼고 싶은 여성들이 핫요가에 큰 관심을 가진다. 퓨전요리가 인기를 끌 듯 퓨전요가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1980, 90년대 에어로빅이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요즘은 요가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이 생겼고, 선생님도 매년 늘고 있다. 인도와 비교하면 선생님들은 대부분이 여자이며 남자 선생님이 매우 적은 편이다.
한국에서 요가 선생이 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요가를 가르치려면 요가 학교를 4년간 다녀야 하고 졸업 논문도 써야 한다. 인도 전통적인 사상까지 배우려면 그 정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반면 한국에서는 몇 달 동안의 훈련만 받아도 요가를 가르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공부와 교육을 중요시하는 한국이 요가에 있어서는 특별한 입장을 선택한 것 같다.
피자에 김치를 첨가해서 안 될 거 없다. 다만 그것은 한국 스타일 피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마틴 프로스트 전 파리7대 한국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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