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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이사를 그만하고 싶은 이유

입력
2016.06.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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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런저런 이유로 어릴 적부터 자주 집을 옮겼다. 결혼하면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마찬가지다. 이달에 또 이사를 갔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근육을 쓰는 게 고되지만 언제부턴가 설렘도 생겼다. 집안 구석구석에서 쏟아지는 서류를 보며 밤을 새는 재미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취재수첩과 각종 문건을 무한정 모아두는 고약한 습관 탓에 베란다엔 케케묵은 종이더미가 가득하다. 쓰레기통에 들어갈 자료를 고르려면 활자를 꼼꼼히 읽어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예기치 않게 ‘월척’을 건질 때가 있다.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썩어 없어질 자료들이 유쾌한 시간여행을 보장해 준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더욱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이번에 발견한 문건은 2006년 ‘법조 브로커’ 윤상림 수사와 관련한 로비 리스트였다. 문건을 들춰보니 단군 이래 최대의 브로커답게 그와 엮인 인물들은 대부분 거물급이었다. 당시 윤씨의 인맥을 잘 알고 있던 인사는 검찰에 출석해 A4 용지 20페이지 분량의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윤씨를 비호하고 윤씨와 부적절하게 어울리던 인사들의 면면을 다시 보니 입이 벌어질 정도로 화려했다. 문건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윤상림은 국회의원, 경찰청장, 군 부대장, 검사장, 판사 사무실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경찰서장은 사람 취급도 안 했다.”

경찰부터 살펴보자. 경찰청장 출신의 A씨와는 친형이나 친아버지보다도 가깝게 지냈다. 수시로 굴비세트와 발렌타인 30년 양주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갔다. 윤씨의 서울 논현동 집에는 경감과 경정은 물론 총경과 경무관, 치안감들까지 자주 찾아와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즐겼는데 윤씨에게 인사청탁을 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당시 경무관 이상 경찰 중에 윤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성 경찰간부와 통화할 때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데도 상대가 꼼짝 못했다.

판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윤씨가 운영했던 지리산의 한 호텔에는 판사들이 자주 찾았다. 윤씨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의 단독판사들을 초대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판사들은 윤씨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했고 종종 창원의 룸살롱까지 가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군 간부들도 윤씨와는 뗄 수 없는 사이였다. 국방부 장관 출신 B씨와는 밤낮으로 전화하는 ‘호형호제’ 사이였으며,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장성들을 그는 서울시내 호텔에서 수시로 만났다. 윤씨는 군의 심장이라는 계룡대를 안방처럼 드나들며 ‘사대부’라는 한정식 집에서 식사를 하고 군인들과 룸살롱까지 함께 갔다.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보안사 기무사 한미연합사 간부들도 윤씨 앞에서는 경계를 풀었다. 이 밖에 유력 정치인 수십 명과 대기업 간부, 공기업 사장, 대통령 친인척도 윤씨의 비리사슬에 얽혀 있었다.

압권은 검사들이다. 그 중에서도 일부 검찰 간부들은 윤씨와 가장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시절 검사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상대로 호기롭게 ‘맞짱’을 떴지만 정작 집안 단속에는 소홀했던 셈이다. 잘 나가던 검사장 C씨는 서울지검장 시절 윤씨와 친형제처럼 지내며 윤씨가 하는 일에는 발벗고 나섰다. 검사장 D씨는 윤상림이라면 꼼짝 못할 정도로 막역했으며 안 되는 것도 되게 해줬다. E검사와는 단순히 친한 정도가 아니었다. 모친 장례식의 모든 잡일을 윤씨가 앞장서서 처리했다. 검사장 F씨의 사무실엔 시간 날 때마다 맘대로 드나들었다. 윤씨는 현재 정당 고위직 F씨와 대학 총장으로 변신한 G씨 또한 예전부터 알고 지낼 정도로 발이 넓었다.

문건을 다 읽었지만 기대와 달리 유쾌한 시간여행이 되지는 못했다. 최근 ‘정운호 게이트’로 불거진 법조비리가 10년 전 벌어진 사건과 너무도 유사했기 때문이다. 브로커들이 판검사와 어울리며 사법질서를 무너뜨렸고, 고위 법관과 검사장 출신 변호사는 돈을 위해 기꺼이 영혼을 팔았다. 이 바닥이 깨끗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달라진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니 허탈함이 밀려왔다. 보지 말았어야 할 종이더미를 발견했다는 후회도 들었다. 이제 이사를 그만 해야겠다.

강철원 사회부 기자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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