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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병상에서 굴러 떨어진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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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병상에서 굴러 떨어진 詩

입력
2016.06.23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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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낸 최승자 시인의 2010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를 낸 최승자 시인의 2010년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개도 없고 구성도 없다. 시가 원래 그런 것이라 하지만 그렇게 쓰려고 한 의지조차 없다. 최승자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를 냈다. 죽음, 초월, 문명, 역사, 인류, 시간…. 시인이 내내 천착해온 단어들이 결합력을 잃은 채 허망하게 흩어져 있다. 길어야 열 줄을 넘지 않는 시들이 뿜는 숨소리는 너무 희박해 귀를 바짝 기울여야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과 떨어져 살아왔나/ “보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아으 비려라/ 이 날 것들의 生)// 구름이 우르르 서쪽으로 몰려간다” (‘얼마나 오랫동안’ 전문)

시인은 수년 전 한 인터뷰를 통해 조현병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다. 11년 만에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을 냈을 때다. 오랫동안 경북 포항의 요양원과 경기도 병원을 오가며 치료 받던 시인은 올해부터 상태가 다소 호전돼 경주 자택에서 혼자 기거하고 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김소연 시인의 “최승자는 자주 아프지만 자주 회복했고, 회복할 때마다 시집을 출간해왔다”는 말에 따르면 이번 시집은 그의 생존 신고다. 모든 인터뷰를 고사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시가 그의 얼굴보다 선명하다.

“아침이 밝아오니/ 살아야 할 또 하루가 시큰거린다/ “나는 살아있다”라는 농담/ 수억 년 해묵은 농담”(‘아침이 밝아오니’ 전문)

이미 오래 전부터 죽음을 넘보던 시인에게 이제는 살아 있다는 말이 농담이다. 그것도 끔찍한 농담이 아닌, 수억 년 묵어 지겨운 농담. 한국 여성 시인 계보 첫 자리에 놓이는 최승자의 시는 한때 가장 날카롭고 가장 뜨거웠지만, 이제 분노는 식어 재처럼 날리고 번뇌는 입가의 침처럼 힘없이 흘러 내린다.

“혁명은 인류의 낡은 꿈/ 이미 잊혔어야 할 꿈// 삭막하다 막막하다/ 사회적 고통 없이는 존재 감각을 못 느끼는 저급한 동물이 인간이다// (나는 벽만 바라보고 있구나)” (‘나는 벽만 바라보고 있구나’ 전문)

제목처럼 텅 빈 시들은, 그러나 완전히 소진된 사람의 숨결에 닿고 싶은 이들을 뜻밖의 무시무시한 힘으로 끌어 당긴다. 낡은 꿈과 해묵은 농담에 지친 이들에게 시인의 오래된 입 냄새는 구원이다. 문명이 여과시킨 공기와는 완전히 다른, 그 독 서린 호흡이 삶에서 굴러 떨어진 자들의 수치를 씻어줄 것만 같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노자와 장자의 말씀이다/ 혁명은 제3차원적인 사회밖에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희비극적 풍경이다/ “인간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그 풍경의 한 철학적 극치이다// 낯가리고 울다 웃는 이 文明의 본성// 쓸쓸히 한 文明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초월이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시들어 떨어져도/ 허공 속엔 여전히 바람이 불어가고 있겠지요)” (‘쓸쓸한 文明’ 전문)

이번 시집이 최승자의 마지막 시집일까. 김소연 시인은 해설에 그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김정환 시인은 바로 전 시집 ‘물 위에 씌어진’의 추천사에서 “기어코 울음이 터지기 전에, 승자야, 승자야”란 말로 간절하게 그의 그림자를 붙들었다. 마지막 시집이 수억 년 전에 쓰인 것 같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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