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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고향 생각

입력
2016.06.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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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보니 어느 것이 본업인지 헛갈릴 때가 있다. 한창 농사일이 바쁠 때는 소설가임을 잊고 소설을 쓸 때는 농군이라는 것을 잊는 식이다. 한창 바쁘던 두 달이 지나고 망중한이 찾아왔다. 지난주에 복숭아 봉지 씌우기를 끝내고 이제 수확까지 달포 가량은 한가한 편이다. 들깨도 심어야 하고 논에도 가끔 나가봐야 하지만 그 정도는 별 시간이 들지 않는 일이다. 하여 곧 잊었던 게 생각났으니 명색 소설가라는 사실이 아니라 봄날이 다 가도록 책 한 권 읽지 않고 지냈다는 참담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독서량이 형편없는 터수인데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에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그중에 한 권이 원로 문학평론가인 유종호 선생이 쓴 에세이였다. 나를 잘 아는 어느 친구가 꼭 읽어보라고 소개해준 것이었는데 과연 재미가 있어서 밤을 새워 읽었다. 선생이 열여섯 살 때 겪은 한국전쟁 몇 달간의 기억을 되살린 회상기였다. 내가 특별히 흥미를 느낀 것은 나와 동향인 선생의 글에서 뜻밖에 평소 궁금했던 내용이 푸짐하게 들어있던 까닭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해방 전후와 전쟁기에 고향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는데 영 풀리지 않던 의문이 몇 가지 있었다. 그런데 그 의문의 실마리가 될 내용이 책 속에 많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내가 살던 작은 마을의 지명과 알 만한 사람까지 속속 등장하는 게 아닌가. 65년 전을 더듬는 선생의 기억력은 악마적으로 디테일했고 문장은 구수했다. 이런 독서는 보통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은 평생 두 번째였다. 다른 한 번은 십여 년 전에 작고하신 노촌 이구영 선생의 회고록이었다. 내가 살던 마을과 개울 건너 이웃 마을에 사셨던 그분은 제천 의병의 후손으로 독립운동과 좌익운동을 거쳐 남파간첩이라는 특이한 경력을 가진 장기수이자 한학의 대가였다. 이십여 년의 감옥살이를 끝내고 이문학회를 세워 수많은 후학을 키워내신 그분의 책을 통해 나는 전쟁 초기 보도연맹 학살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비밀을 수십 년 만에 알게 되었다. 내 가족도 몰랐던 일을 저명한 이의 저술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 꽤나 기이한 감정이 들었다. 노촌 선생의 꼿꼿함과 유학자로서의 풍부한 교양이 깃든 책을 읽으며 기록의 힘이 곧 역사임을 가슴 서늘하게 새기기도 했다.

유 선생의 책을 읽으며 혼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내 고향 마을은 충주댐이 생기면서 수몰되어 영원히 사라져버렸는데 마을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 ‘신댕이’였다. 이는 전형적인 충청도식 발음으로 본래는 신당이라는 어엿한 한자도 있다. 나는 어쩐지 두루뭉술하고 느려터진 발음이 싫어서 혹 쓸 일이 있으면 꼭 신당이라고 쓰는데 선생은 꼭 ‘신댕이’라고 쓰는 게 아닌가. 책 속 여러 지명을 기억에 남아있는 대로 서슴없이 충청도 발음 그대로 쓰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선생이 옳고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였다. 충청도가 다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우리 지역에서는 딱 부러지는 발음을 잘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원명이라는 꽤 괜찮은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는데, ‘원맹이’도 모자라 누구나 ‘엄맹이’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두 이름의 간격이 너무 커서 결국 조금 모자라는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끝내 풀지 못한 것은 대체 어떻게 충주댐이 될 줄 미리 알고 마을 이름을 신당(新塘), 그러니까 새 못이라고 지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앞날을 내다보았다는 식의 비과학적인 추론을 믿지 않는 나로서는 난감한 노릇인데 며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일제강점 기에 이미 댐을 세울 자리를 물색했던 것이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아마 시나브로 그런 지명을 얻게 되었을 거라고. 아니라도 더 고민하기에는 이미, 물 속인 것을.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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