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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대통령의 사과

입력
2016.06.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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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 당시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 개방을 막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우루과이라운드(UR) 참여로 취임 10개월 만에 공약을 파기하는 상황에 처하자 TV생중계를 통해 “국민에게 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사과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취임 첫 해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공약 폐기를 선언하며 “국민과 소통하며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대선 때 내건 영남권 신공항 건설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2011년에 세 차례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 역대 대통령들은 대선 핵심 공약을 바꾸거나 축소할 경우 어김없이 사과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는 좀 달랐다. 2012년 대선 때 핵심 공약으로 내세운 노인 기초연금이 대폭 후퇴하자 여론이 들끓었다. 진영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 청와대와 갈등 끝에 사퇴하는 등 파문이 커지자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어르신들 모두에게 지급하지 못하는 결과가 생겨서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을 뿐이다. 내용과 형식을 놓고 ‘대국민 사과’냐, 아니냐는 논란이 일었을 정도다.

▦ 영남권 신공항 건설 대신 김해공항을 확장하기로 결정해 공약 파기 논란이 일자 청와대가 강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기존 입지를 선택해 놓고는 공약 파기가 아닌 실천이라니 궤변에 가깝다. 이런 마당에 사과 요구는 언감생심이다. 박 대통령은 유독 사과에 인색하다는 평을 듣는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4ㆍ13총선 참패 등 국정운영의 잘못이 드러나도 속 시원하게 사과한 적이 없다. “대통령으로서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김영삼), “하늘을 우러러보고 국민에게 죄인 된 심정”(노무현),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다”(이명박) 는 식의 절절한 표현은 기대하기 어렵다.

▦ 박 대통령의 사과는 언제나 늦고, 간접적이며, 자기 반성이 빠져있다. 그 이유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은 무오류에 대한 자기 확신이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아래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국민을 국정의 동반자가 아닌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대통령이 국민 앞에 고개 숙이는 걸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사과를 주저하는 걸 부끄러워해야 한다.

이충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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