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선 친구가 서로의 뺨을 때리기 시작하자 웅성거리던 동료들이 숨을 죽였다. 선생님은 무언가 잘못한 학생 둘을 불러내 서로의 뺨을 때리게 하다 성에 안 찼는지 한 학생의 뺨을 내리치며 겁박했다. “살살 때리는 놈은 내가 때린다!”
두 친구의 손이 점점 매워졌다. 이상한 건 처음에는 당황하던 반 동료들이 점차 숨죽이는 관객이 되어갔다는 점이다. 부당한 체벌에 대한 분노가 경쟁으로 희석된 것이다. 선량한 친구의 손이 맵게 움직이면, 엉뚱하게도 우리는 그의 인간성을 의심하며 수군거렸다. 이따금 숙취처럼 떠오르는 학창시절의 불쾌한 추억이다.
한때 SBS의 ‘K팝스타’를 열심히 본 적이 있다. 그때 TV 앞에 나를 잡아둔 건 출연진의 노래 솜씨가 전부는 아니다. 아마추어 출연진이 기성 가수보다 노래를 잘할 것 같진 않다. 돌이켜 보면, 출연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경쟁 시스템이 긴장을 고조시켰으리라. 우리에게 공정한 경쟁은 일종의 마취제 같은 것이다. 경쟁이 공정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지만, 그러면 정말 우리는 행복할까. 뺨을 번갈아 때리면 공정한 걸까.
경쟁의 폐해는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가난한 산동네는 사라졌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사람들이 빌딩 숲을 거닌다. 세상은 온통 풍요롭고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인다. 그러다 문득, 우리는 낯선 이의 죽음을 마주하고 오열한다. 강남역 인근에서 살해된 젊은 여성의 죽음에서 낯설지 않은 무엇을 느낀 것이다. 지하철 안전문을 고치던 젊은이의 죽음에 대한 추모 역시 낯설지 않은 무엇에 대한 반응이다. 두 젊은이의 모습에서 나를 보고, 가족을 보고, 희망 없는 사회를 본 것이다. 두 죽음에 대한 추모 열기가 경쟁사회의 약자라는 고리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젊은 여성의 죽음을 여성혐오로 몰아가는 것은 사회시스템의 문제를 종족의 문제로 오해한 것이다.
추모 열기를 몰고 온 두 사건의 가장 큰 원인은 희망 없는 경쟁이다. 누구는 자신보다 약한 자를 찾아 나선 이의 희생양이 되었고, 누구는 영문도 모른 채 경쟁에 나섰다 죽음을 맞은 것이다. 두 젊은이의 죽음에 대한 추모가 자기연민이라는 우울한 견해도 있지만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추모 열기가 인권 평등 자유 등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사회를 바꿀 힘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린 물어야 한다. 우린 왜 서로 돕고 배려하는 세상을 꿈꾸면 안 되는지.
애초 우리가 알고 있던 자본주의는, 정도의 차는 있지만 자연스러운 물물교환 형태의 시장에서 작동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시장이 아니라 경쟁 자체를 시스템으로 한 체제다. 소위 신자유주의는 정부가 나서서 삶의 환경을 경쟁 체제로 만들고, 국민 개개인을 각자도생의 냉혈한으로 만들었다. 사회 발전이 끝없는 경쟁 덕분이라는 소문을 유포하는 자들은 경쟁이 사람의 본성인 듯 말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논리가 아닌 주술에 불과하다. 서로의 뺨을 때리도록 하는 경쟁 시스템이 만든 환영일 뿐이다. 이는 철학자 푸코의 생각이기도 하다.
중세의 계급사회에서 풍요로운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도시의 자유로운 공기가 있어 가능했다. 땅과 신분에 묶여 있던 농노들이 영지를 벗어나 도시에서 자유를 누렸고, 그 힘이 유럽에서 신분을 해체하고 자본주의를 연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연 것은 ‘자유’지 ‘경쟁’이 아니다. 자유를 경쟁으로 착각한 순간 세계는 제국주의 전쟁으로 빠져드는 지옥을 경험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선인이 그 와중에서 학살되거나 희생됐다.
우리가 적이 아닌 동등한 시민이라 생각하는 한, 경쟁이 의미 있으려면 경쟁을 통해 우리 모두의 자유가 커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경쟁에 공정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그것은 절망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경쟁의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이상현 한옥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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