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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매수… 과연 심판만의 문제일까

입력
2016.06.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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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전선이 남부지방에 상륙해 유난히 습하고 무더웠던 21일, 울산에 거주하는 이병훈(53) 전국 축구심판협의회장은 새벽같이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 사무실이 있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기 위해서다.

심판협의회는 심판들의 권익보호와 친목도모를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심판들 사이에서 ‘할 말은 하는’ 올곧은 심판으로 잘 알려진 이 회장은 “심판복을 벗겠다는 각오로 나섰다”며 피켓을 들었다.

이병훈 전국 축구심판협의회장이 21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윤태석 기자
이병훈 전국 축구심판협의회장이 21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윤태석 기자

그는 석고대죄부터 했다. 최근 한국 축구는 심판 비리로 홍역을 앓았다.

경남FC가 심판 4명을 매수한 데 이어 K리그 명문이라는 전북 현대마저 심판에게 돈을 건넨 사실이 확인됐다. 전직 심판위원장 두 명까지 심판과 특정 구단으로부터 돈을 받았다. 이 회장은 “얼굴을 들 수가 없다”며 “열심히 땀 흘리고 명예를 지킨 심판들까지 욕을 먹고 있다. 대표로 사죄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 회장은 또한 수면 아래 숨은 비리의 발본색원과 관련 책임자 처벌도 주장했다. 지금 축구계에서는 심판들만 소위 ‘죽일 놈’이 됐을 뿐 이들을 관리, 감독했던 인사들의 책임론은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다.

기소된 두 명의 전직 심판위원장 A, B씨는 축구협회와 프로연맹에서 직접 임명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10년 가까이 심판계를 좌지우지할 때 온갖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A씨는 정몽규 축구협회장이 2013년 1월 당선된 뒤 첫 집행부를 꾸릴 때 초대 심판위원장이었다. 당시 심판위원장 적임자가 없어 한참 찾느라 다른 위원장들은 다 선임해 놓고도 공식 발표가 미뤄졌다. 고심 끝에 A씨를 낙점하자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이 나왔다. A씨는 그 해 5월 심판 체력테스트에서 특정 심판을 비호하도록 부정행위를 지시했다. 축구협회는 이 사실을 쉬쉬하다가 언론보도가 터지자 그제야 진상위원회를 구성했고, A씨는 결국 임기를 1년도 못 채우고 2013년 말 권고사직 당했다.

B씨가 프로연맹 심판위원장으로 있던 2012년 말의 일이다. 객관적 전력에서 열세인 지방 C구단이 수도권 D구단을 1-0으로 이겼다. 경기 뒤 심판들이 C구단에게 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비디오분석 결과 부심 E씨가 6개의 오프사이드 오심을 저질렀다. 영상을 본 심판 출신 한 축구인은 “프로심판이라면 절대 실수할 수 없는 오심이다”고 단정했다. E씨는 이후 배정을 못 받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전직 프로심판이 축구협회에 제보한 투서를 보면 2013년 지방에서 열린 경기를 하루 앞두고 A,B 위원장이 자기 수족과 다름 없는 심판을 데리고 유흥주점에서 양 구단 관계자와 각각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마주쳐 서로 놀랐다는 믿기지 않을 이야기도 나온다. 투서에 등장한 A,B 위원장과 두 명의 심판은 이번 매수 사건 때 모두 기소됐다.

축구협회와 프로연맹은 이때마다 당사자들을 조용히 내보내며 급한 불을 끄는 데 급급했다. ‘수사권이 없어 어쩔 수 없다’며 비리를 파헤치는 데는 인색했다. 결국 검찰의 손에 추태가 드러났다. 축구협회와 프로연맹 수뇌부도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누구 하나 책임은커녕 제대로 사죄조차 안 한다. ‘앞으로 비리 심판은 더욱 엄단 하겠다’며 모든 잘못을 심판에 돌리는 ‘유체이탈’ 행태만 보이고 있다.

이번 사건은 심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축구의 구조적인 병폐가 곪아 터졌다고 봐야 한다. 이 사실을 인정할 때 제대로 된 대안이 나올 수 있고 한국 축구가 한 걸음 더 진전할 수 있다. 현직 심판이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 1인 시위를 통해 온몸으로 말하고 싶은 게 이거 아닐까.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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