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영화 엔딩 크레딧의 스태프 부분에서 뜻밖의 낯익은 이름들이 자주 눈에 띈다. 제작, 기획, 연출 등 연기 외의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배우들이다. 2014년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 ‘노예 12년’의 제작자 브래드 피트, 2013년 아카데미 작품상에 호명된 영화 ‘아르고’의 감독 벤 애플렉처럼, 한국영화에서도 연기 너머 활동 영역을 넓히는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다.
16일 개봉한 영화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는 배우 배용준이 제작에 참여해 화제가 됐다. 이 영화의 제작사는 배용준이 대주주로 있는 매니지먼트사 키이스트의 자회사인 콘텐츠케이다. 콘텐츠케이는 TV드라마 ‘드림하이’, ‘밤을 걷는 선비’, ‘울랄라 부부’, ‘비밀’, ‘발칙하게 고고’ 등을 만들며 축적한 역량과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배용준은 ‘특별수사’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진 않았지만 기획에서 개봉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 정우성도 올해 초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를 개봉하며 제작자 신고식을 치렀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촬영 당시 출연 배우와 스크립터로 만나 인연을 이어온 이윤정 감독의 스크린 데뷔를 돕기 위해 직접 제작사를 차렸다. 제작사 이름은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따온 더블유(W)팩토리다. 최근엔 20년지기 배우 이정재와 의기투합해 아티스트컴퍼니라는 종합엔터테인먼트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더블유팩토리는 영화 제작에 주력하고 아티스트컴퍼니는 이와 별개로 배우 매니지먼트를 맡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아티스트컴퍼니에 쏠려 있는 영화계의 관심은 매우 뜨겁다. 영화 ‘태양은 없다’(1998) 이후 꾸준히 추진돼 온, 두 배우의 재회 프로젝트가 본격 가동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아티스트컴퍼니의 출범이 ‘배우 제작자 시대’의 신호탄이 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배우 마동석은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다. 3~4년 전부터 시나리오 사무실을 운영하며 신인 감독, 작가들과 공동 작업으로 시나리를 쓰고 있다. 형사물과 코미디, 버디무비 등 7~8개의 프로젝트를 현재 개발 중이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함정’은 첫 번째 결실이었다. 국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세계3대 판타지영화제 중 하나로 꼽히는 포르투갈 판타스포르투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마동석은 “미국 할리우드 배우들 중엔 시나리오 사무실을 운영하는 이들이 많다”며 “미국에서 배우를 꿈꿀 때부터 꼭 한번 시도하고 싶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또 “영화 기획을 하면서 작품 전체를 보는 눈을 갖게 됐다”며 “시나리오 기획이 연기를 할 때도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연출은 배우들이 가장 많이 겸직하는 분야다. 배우 하정우는 감독으로 ‘롤러코스터’(2013)와 ‘허삼관 매혈기’(2015)를 개봉했다. 주목 받는 차세대 배우 안재홍도 단편영화 ‘검은돼지’의 감독으로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았다. 과거와 달리 고가의 장비 없어도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젊은 배우들의 연출 도전이 늘고 있다.
활동 영역 확대가 알려지는 걸 꺼려하는 배우들도 있다. 영화 제작이나 기획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배우로서 이미지 훼손을 우려해 회사 이름 뒤에 자신을 감추는 경우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배우에게 사업가 이미지가 생기면 연기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오해나 억측을 부를 수도 있기 때문에 연기 외의 활동에 조심스러워하는 이들이 많다”고 전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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