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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 조각상’ 결코 해프닝이 아니다

입력
2016.06.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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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 설치된 극우성향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를 상징하는 손 모양의 동상이 파손된 모습. 신재훈 인턴기자
지난 1일 서울 홍익대학교 정문 앞에 설치된 극우성향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를 상징하는 손 모양의 동상이 파손된 모습. 신재훈 인턴기자

서울 홍익대 정문에 기념비처럼 설치돼 물의를 일으켰던 이른바 ‘일베 수인(手印) 조형물’은 지난 1일 새벽 ‘랩퍼성큰’으로 불리는 김성근씨와 두 명의 홍대 재학생에 의해 크게 파손된 이후, 작가 측에 의해 조용히 철거됐고, 점차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이대로 논의를 중단하고 망각해도 괜찮을까.

석고와 우레탄폼 등으로 제작된 이 조형물은 홍익대 조소과 4학년생인 홍기하씨가 ‘환경조각연구’ 수업에서 과제로 제작해 연례행사인 ‘야외조각전’에 출품했던 것으로, 제목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 데도 없다’였다. 5월 30일 대학 정문 우측의 기단부에 설치된 이후 SNS에서 급속히 논란거리로 떠올랐고 전시 개막일인 31일 비판자들은 해당 작업에 항의 메시지를 담아 포스트잇을 부착하거나 음료수를 붓거나 계란을 투척했다. 계란 투척은 누군가 계란 한 판을 조각상 앞에 두고 개당 500원에 판매했기에 유도된 결과기도 했다.

5월 31일 작가는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일베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의도는 없었다”는 다소 기만적 입장을 밝히며 자신의 작업을 변론하고자 했다. “사회에 만연하게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일베라는 것을 실체로 보여줌으로써 이것에 대한 논란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 ‘작품의 의도’라고 주장했다. “계란을 던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실제로 일어나는 걸 보고 놀랐다”고도 말했다.

그렇다면, 약자와 소수자와 노무현 대통령을 향한 혐오와 적개심의 표출을 ‘놀이화’해 온 ‘일베’의 인증 수인을 공공장소에 기념비 형태로 제시한 작업을, 질문 형태의 도발적 현대미술로 용인하는 것이 마땅했을까? 의도가 중립적이면, 약자와 소수자들을 위협하고 죽은 이를 모욕해온 ‘일베’의 상징을 예술품으로 참고 봐야 하는 것일까? 실제로, 진중권은 6월 1일 트위터를 통해 “저 작품이 마음에 안 들 때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그냥 ‘몰취향하다’고 말하며 지나치는 것뿐”이라고 말하며 작품을 파괴한 이들을 “일베보다 더 무서운 게 이런 짓 하는 놈들”이라며 꾸짖기도 했다.

현대미술평론가로서 간단명료하게 답하자면, ‘일베 조각상’ 따위를 만들어 공중 앞에 제시하고는 작품으로 존중하라고 요구하는 일은, 후안무치한 수작에 불과한 것으로서, 예술품으로 용인하지 않고 즉각적인 철거를 요구해도 된다. 게다가 여보란 듯, 반달리즘이 예상되는 장소에 조형물을 단단히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설치한 것도 실은 숨은 ‘의도’가 있었을 터이다.

기념 조상의 훼손은 대체로 부정적인 일로 볼 수 있지만, 같은 논리로 혁명가 레닌의 동상을 철거한 개혁 개방 지지 시위대를 비판할 수도 있고, 4ㆍ19 혁명 당시 독재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한 시민들을 비난할 수도 있다.(생각해보라, 독일에서 누군가, 가치 판단의 유보를 전제로, 나치식 경례를 하는 히틀러 조각상을 제작해 공공장소에 전시해놓으면 해당 작품과 작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럼, ‘현대미술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는 질문 형태의 기호로 그쳐도 되고, 해석은 관객의 몫으로 남으며, 작가에겐 유명세가 주어진다’는 식의 관성적 미술 소비 방식은 2016년 오늘의 사회에 부합하는 것일까? 내 대답은, ‘아니오’다. 그런 얄팍한 판단 유예의 전략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전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영브리티시아트(yBA) 등 허풍선이들의 예술-마케팅-실천이 남긴 미적ㆍ윤리적 퇴행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다.

현대미술에 대한 끔찍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아무거나 만들거나 가져다 놓아도 ‘의도’가 특별하면 예술로 성립한다는 믿음이다. ‘의도’가 어떤 합당한 ‘과정’을 거쳐, 특정한 재료나 매체로 ‘구현’되고, 또 ‘제시’됐느냐를 봐야 한다. ‘의도’만으로 아무거나 예술이 되진 않는다. 작가의 공표된 ‘의도’는 작업의 구현ㆍ성립과 해석에 공히 영향을 미치나 그것이 참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럴 리야 없을 것 같지만, 몇 년 뒤 작가가 “실은 ‘일베’를 기념하는 의도로 만든 게 맞았다”고 말해버리면 어쩔 텐가.

결론을 힘줘 강조하겠다: 작자의 의도가 선하거나, 작자가 의도의 공표를 통해 중립을 취한다고 해서, 공중 앞에 제시된 기념비 형식의 ‘일베 상징물’이 용인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베’로부터 혐오와 조롱을 받아온 이들에겐 ‘일베 조각상’의 철거를 요구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현대미술가에게 절대적 자유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혐오의 상징을 확대 재생산할 자유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현대미술가에겐 절대적 자유가 허락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점은 꽤 놀랍다. 작업으로 인해 파생되는 미적ㆍ윤리적 문제의 책임은 고스란히 작가의 몫이다. 타인의 권리와 명예와 존엄을 침해하는 작품을 함부로 전시하면 작가뿐만 아니라 해당 전시 기관에도 얼마든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이다.

홍기하씨의 ‘일베 조각상’은 수업 과제물이었다. ‘혐오 표출을 밈(Meme) 양태의 놀이로 삼아온 불순 세력의 수인 조각상’을 공중 앞에 제시한 일에 관해 작가뿐만 아니라 지도교수와 해당 학과와 학교 당국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옳다. 이는 결코 ‘표현의 자유’로 용인 혹은 양해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일베’가 괴롭혀온 약자와 소수자들을 비롯한 시민사회에 사과하고, 사회 전면에 도드라지는 ‘일베’라는 존재의 상징적/실제적 위험성을 인정하고, 다시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지식인들마저 공공장소에 기념비로 제시된 ‘일베 수인 상징물’의 위험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이번 사건을 통해 드러난 또 다른 큰 문제다. 적잖은 이들이 ‘일베’를 사회에서 소외된 청년들만의 넷-문화로 착각한다. 하지만 ‘일베’에 참여하는 이들 가운데 허우대 멀쩡한 전문직 엘리트도 없잖다. 거리로 나와 얼굴까지 드러내기 시작하는 ‘일베 추종자’들에게 언론까지 관심을 주는 것은 장차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일베’의 상징이 미술품의 형태로 공공장소에 제시되고 분노한 이들에 의해 훼손-파괴된 사건은 ‘일베 추종자’들에게 어떤 의미로 독해됐을까?

한국사회는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일본의 넷우익 사례와 비교해 봐도 그렇다. 국내 주요 방송은 ‘일베 추종자’들의 이야기를 함부로 인터뷰해 방송하지 말아야 한다(일본의 주요 뉴스가 거리에 나온 넷우익의 목소리를 정당한 시민의 의견 가운데 하나로 보도하던가). 실재계로 나오려는 넷우익형 집단의 무서움을 알아야 한다.

‘일베’의 전략 가운데 하나는 공격 대상으로 삼은 약자와 소수자의 이미지를 집요하게 훼손-조작해 웃음거리로 삼는다는 것이다. 스마트기기의 등장 이후 이미지의 사회적 존재 방식은 크게 변했다. 특정인의 디지털 이미지는 아날로그-실재의 단순 재현이나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SNS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실존을 재현-구현하고 또 그를 통해 사회적 삶을 영위한다.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특정인의 이미지는 특정인의 사회적 실재와 밀접하게 연동하고 있기에 그를 훼손-모욕하는 조작 이미지의 유포는 실존적 위협에 육박하게 됐다. 한데,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의 이미지를 훼손-모욕하는 조작 이미지가 일단 유포되면 그것을 지우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네트워크에 복수로 산재하는 ‘짤방’이나 ‘움짤’ 형식의 파일들은,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관리-통제할 수 없다.

‘일베 수인 조형물’을 작품으로 존중하라는 주장은 약자와 소수자들에게 훼손-조작 이미지를 통해 자행되는 인간 존엄 절하의 부당한 위협을 감내하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세상이 크게 바뀌었으면 가치 판단의 기준점들도 재고해야 한다. 보수파건 진보파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시대다. ‘아차!’해볼 틈도 없이 자연스럽게 오판하고, 큰 실수를 저지를 수가 스마트기기로 재매개된 우리 삶의 곳곳에 게임 속 지뢰처럼 산재한다. 당신은 곳곳에 레디메이드-실수-경험의 양태로 임베드된 위험을 사전에 인지하고 피할 능력을 갖췄는가?

임근준 미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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