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노동자와 여행자…천국보다 낯선 선상 랑데부

입력
2016.06.20 11:30
0 0

1탄 ▶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2탄 ▶ 준비할 서류만 스무고개

3탄 ▶ 화물선 여행 실전 가이드

4탄 ▶ 무면허 기수가 되어 태평양을 항해하다 를 읽고 넘어오세요.

비행기란 교통수단과 호텔이란 숙박의 컬래버레이션인 화물선. 같은 방향, 다른 목적인 승객과 선원이 한 화물선에 탑승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태평양은 말해주지 않았다.

승객과 선원의 합일점 선상 파티. 르누아르 작품 ‘선상파티의 점심’의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승객과 선원의 합일점 선상 파티. 르누아르 작품 ‘선상파티의 점심’의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화물선이란 제한된 공간에서도 선원을 마주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승객 입장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스튜어드이자 매일 아침 방 청소를 하는 메이드인 투도렐(Tudorel)이 최측근일 뿐이었다. 오후 6시 즈음 푸짐한 저녁 식사를 영접하기 위해 헬스장에 가면, 이두박근 울퉁불퉁한 그들의 기합소리에 주눅들어 되돌아오기 십상이었다. 복도에서의 만남은 더 데면데면했다. 자주 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낯선 거리에서 만났을 때 인사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의 질감이랄까.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관계, 그게 승객과 선원 사이 4차원의 벽이었다.

▦매일 아침 통제구역으로 진격

조타(操舵) 및 통신 장치, 레이더 등 전자동으로 운행되는 선교에서 되레 선장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
조타(操舵) 및 통신 장치, 레이더 등 전자동으로 운행되는 선교에서 되레 선장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
전 세계의 이슈와 ‘단절된 여행’이란 기분은 이 무전기로부터 받는다.
전 세계의 이슈와 ‘단절된 여행’이란 기분은 이 무전기로부터 받는다.
운항 계획과 역사의 세세한 기록은 인간의 몫. 지우개가 강한 힘을 발휘한다.
운항 계획과 역사의 세세한 기록은 인간의 몫. 지우개가 강한 힘을 발휘한다.

우린 의도적으로 그들과 접선할 계획을 짰다. 매일 아침 통제구역 중 하나인 선교(船橋, 선박운항통제소로 이곳에선 Nav’ Deck라 불린다)로 성급히 쳐들어갔다. 선교는 가늠할 수 없는 태평양에 물길을 내며 화물선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는 곳이다. 밤새 있었던 화물선의 공사다망한 소식은 이곳에서 쏟아졌다. 단, 쳐들어간 자가 감내해야 할 대가도 기다렸다. 가령 고독한 참모인 무구르(Mugur)의 대쪽 같은 말을 들었을 때다. “우린 1시간 안에 선박의 앞머리를 볼 수 있을지 몰라. 4~5m 정도의 풍랑을 만날 것 같거든.”

숙소로 돌아오자 테이블 위의 펜이 좌로 또로로, 뒤로 또로로 변주했다. 확대된 동공과 경직된 몸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이란? 선원들의 수군대는 대화를 주문처럼 외우는 일이었다. “이럴 때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지. 돈을 세는 일과 사랑을 나누는 일. 이왕지사 두 가지 다면 좋겠군.” 프랑스인의 무시무시한 위기 탈출 문장이었다.

▦선원은 무엇으로 사는가, 엔진 투어

풍랑이라는 기이한 화제가 물러나고 다시 안단테인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기계공 대장 얀(Yann)이 엔진을 볼 의향이 있는지 승객 전원에게 물었다. 화물선의 가장 하부에 있는 선원들만의 성역으로 초대였다. 짜릿한 스타카토였다. 상상해본 적도, 상상할 수도 없는 화물선의 자궁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소음 방지용 귀마개를 장착한 뒤 잠수하듯 4~5층에 달하는 엔진 시설로 급하강했다. 낯섦이 무뎌진 오감을 깨웠다. 마성의 기계부터 연료 냄새가 섞인 특유의 비린내와 미끄덩거리는 바닥이 이질적이었다. 2006년 2월에 완공된 이 부산 태생의 화물선은 가성비 좋은 Hyundai-MAN B&W를 메인 엔진으로 장착하고 있었다. 숱한 엔진의 기계음에 실신할 때쯤 안심할 크기의 비상용 대피처와 항구마다 현지 파일럿이 승선하는 비밀 통로를 들쑤시는 모험도 강행했다. 그런데 곧 불편해졌다. 견학이라기보단 남의 집 불구경에 가까운 이 방관이 부끄러웠다. 보이지 않던 선원들의 삶이 이곳에 있었다. 분업화된 각자의 위치에서 기계와 기계 사이 고독한 작업을 하는 노동이여. 빈둥거리는 여행자는 이만 하직을 고했다.

투어 전, 얀이 전반적인 화물선의 엔진을 설명하는 중. 슈퍼 헤비급 귀마개로 애교도 발휘.
투어 전, 얀이 전반적인 화물선의 엔진을 설명하는 중. 슈퍼 헤비급 귀마개로 애교도 발휘.
감전되면 즉사를 알리는 영화 ‘매트릭스’ 액션의 직설적인 그래픽.
감전되면 즉사를 알리는 영화 ‘매트릭스’ 액션의 직설적인 그래픽.
어린아이의 손가락만한 크기부터 람보 팔뚝보다 더 굵은 갖가지 연장 앞에선 수시로 다리가 풀렸다.
어린아이의 손가락만한 크기부터 람보 팔뚝보다 더 굵은 갖가지 연장 앞에선 수시로 다리가 풀렸다.
선원 중 홍일점. 엔지니어 클레멘스(Clemence)가 해수를 담수화하는 기계를 점검하고 있다.
선원 중 홍일점. 엔지니어 클레멘스(Clemence)가 해수를 담수화하는 기계를 점검하고 있다.
Hyundai-MAN B&W 엔진은 약 30m 길이, 12개의 실린더로 10m에 달하는 프로펠러를 가동한다.
Hyundai-MAN B&W 엔진은 약 30m 길이, 12개의 실린더로 10m에 달하는 프로펠러를 가동한다.

▦이 핑계 저 핑계, 네버엔딩 파티 타임

엔진 투어 후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없다던 투정도 쑥 들어갔다. 사실 선원에겐 화물선이 일터다. 이들에게 태평양 위 하루는 육지의 직장인과 다를 바 없었다. 점심을 제외하고 프랑스인은 8시간, 루마니아인은 9시간의 정규 시간을 지키며, 일부 조타수나 참모 역할을 하는 이들만 교대 당직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퇴근 후 이들은 태평양 어디에서 회포를 푸나? 불시에 여는 파티가 여가의 본능을 대체했다.

파티 시리즈의 시작은 모든 승객이 탑승한 요코하마 항을 떠난 직후 승객을 위한 웰컴 파티였다. 이어 기계공 대장 얀의 생일이 때마침 '걸려' 바의 술병이 비워지고, 여행 막바지에 다소 내외하던 선원들과 합석하는 점심 정찬이 마련됐다. 급격히 스케일이 커진 파티는 승객의 호의가 도화선이었다. 멕시코 입국세를 대신 냈다는 선장의 배려에 모든 승객이 합심해 면세점의 술을 털었고, 배포 큰 선장은 야외 바비큐 파티를 열자고 몰아붙였다. 아, 코발트 빛 태평양이 바로 곁이었다. 여행자든 선원이든 전 탑승객의 여러 다른 삶이 태평양 위에 발그레하게 노출되었다. 장작불은 쉬이 꺼지지도 않았던가?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가치관의 인생이 뒤엉켰다.

파티 때면 승객이 접근할 수 없는 식당 위 칵테일 바가 화려하게 열린다. 웰컴!
파티 때면 승객이 접근할 수 없는 식당 위 칵테일 바가 화려하게 열린다. 웰컴!
얀의 생일 선물로 마련한 캐리커처. 짓궂은 풍랑 속에서 완성한, 눈물 나는 졸작이었다.
얀의 생일 선물로 마련한 캐리커처. 짓궂은 풍랑 속에서 완성한, 눈물 나는 졸작이었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장작 타는 냄새의 혼연일체가 없던 식욕도 충동질했다. 나의 꼬치를 잊지 마세요.
짭조름한 바다 내음과 장작 타는 냄새의 혼연일체가 없던 식욕도 충동질했다. 나의 꼬치를 잊지 마세요.
바다 사나이의 DNA엔 흥이 내재되어 있는 듯했다.
바다 사나이의 DNA엔 흥이 내재되어 있는 듯했다.
TV를 반납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난 대화의 웃음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TV를 반납하고 마음과 마음이 만난 대화의 웃음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프로젝트팀처럼 구성되어 선원들끼리도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를 그때 그 얼굴들.
프로젝트팀처럼 구성되어 선원들끼리도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를 그때 그 얼굴들.
태평양에 우리의 빛나는 인생을 위해 건배!
태평양에 우리의 빛나는 인생을 위해 건배!

언젠가 얀은 선원들을 대표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우린 진짜 이해가 안돼요. 대체 왜 화물선을 타는 거예요?" “글쎄요… 그걸 알고 싶어서인가 봐요.” 어떤 일탈과 낯섦이 우리의 삶을 끌고 가고 있었다.

강미승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