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탄 ▶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2탄 ▶ 준비할 서류만 스무고개
3탄 ▶ 화물선 여행 실전 가이드
4탄 ▶ 무면허 기수가 되어 태평양을 항해하다 를 읽고 넘어오세요.
비행기란 교통수단과 호텔이란 숙박의 컬래버레이션인 화물선. 같은 방향, 다른 목적인 승객과 선원이 한 화물선에 탑승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태평양은 말해주지 않았다.
화물선이란 제한된 공간에서도 선원을 마주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승객 입장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스튜어드이자 매일 아침 방 청소를 하는 메이드인 투도렐(Tudorel)이 최측근일 뿐이었다. 오후 6시 즈음 푸짐한 저녁 식사를 영접하기 위해 헬스장에 가면, 이두박근 울퉁불퉁한 그들의 기합소리에 주눅들어 되돌아오기 십상이었다. 복도에서의 만남은 더 데면데면했다. 자주 가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낯선 거리에서 만났을 때 인사를 할지 말지 고민하는 순간의 질감이랄까.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관계, 그게 승객과 선원 사이 4차원의 벽이었다.
▦매일 아침 통제구역으로 진격
우린 의도적으로 그들과 접선할 계획을 짰다. 매일 아침 통제구역 중 하나인 선교(船橋, 선박운항통제소로 이곳에선 Nav’ Deck라 불린다)로 성급히 쳐들어갔다. 선교는 가늠할 수 없는 태평양에 물길을 내며 화물선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는 곳이다. 밤새 있었던 화물선의 공사다망한 소식은 이곳에서 쏟아졌다. 단, 쳐들어간 자가 감내해야 할 대가도 기다렸다. 가령 고독한 참모인 무구르(Mugur)의 대쪽 같은 말을 들었을 때다. “우린 1시간 안에 선박의 앞머리를 볼 수 있을지 몰라. 4~5m 정도의 풍랑을 만날 것 같거든.”
숙소로 돌아오자 테이블 위의 펜이 좌로 또로로, 뒤로 또로로 변주했다. 확대된 동공과 경직된 몸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이란? 선원들의 수군대는 대화를 주문처럼 외우는 일이었다. “이럴 때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지. 돈을 세는 일과 사랑을 나누는 일. 이왕지사 두 가지 다면 좋겠군.” 프랑스인의 무시무시한 위기 탈출 문장이었다.
▦선원은 무엇으로 사는가, 엔진 투어
풍랑이라는 기이한 화제가 물러나고 다시 안단테인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기계공 대장 얀(Yann)이 엔진을 볼 의향이 있는지 승객 전원에게 물었다. 화물선의 가장 하부에 있는 선원들만의 성역으로 초대였다. 짜릿한 스타카토였다. 상상해본 적도, 상상할 수도 없는 화물선의 자궁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소음 방지용 귀마개를 장착한 뒤 잠수하듯 4~5층에 달하는 엔진 시설로 급하강했다. 낯섦이 무뎌진 오감을 깨웠다. 마성의 기계부터 연료 냄새가 섞인 특유의 비린내와 미끄덩거리는 바닥이 이질적이었다. 2006년 2월에 완공된 이 부산 태생의 화물선은 가성비 좋은 Hyundai-MAN B&W를 메인 엔진으로 장착하고 있었다. 숱한 엔진의 기계음에 실신할 때쯤 안심할 크기의 비상용 대피처와 항구마다 현지 파일럿이 승선하는 비밀 통로를 들쑤시는 모험도 강행했다. 그런데 곧 불편해졌다. 견학이라기보단 남의 집 불구경에 가까운 이 방관이 부끄러웠다. 보이지 않던 선원들의 삶이 이곳에 있었다. 분업화된 각자의 위치에서 기계와 기계 사이 고독한 작업을 하는 노동이여. 빈둥거리는 여행자는 이만 하직을 고했다.
▦이 핑계 저 핑계, 네버엔딩 파티 타임
엔진 투어 후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없다던 투정도 쑥 들어갔다. 사실 선원에겐 화물선이 일터다. 이들에게 태평양 위 하루는 육지의 직장인과 다를 바 없었다. 점심을 제외하고 프랑스인은 8시간, 루마니아인은 9시간의 정규 시간을 지키며, 일부 조타수나 참모 역할을 하는 이들만 교대 당직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퇴근 후 이들은 태평양 어디에서 회포를 푸나? 불시에 여는 파티가 여가의 본능을 대체했다.
파티 시리즈의 시작은 모든 승객이 탑승한 요코하마 항을 떠난 직후 승객을 위한 웰컴 파티였다. 이어 기계공 대장 얀의 생일이 때마침 '걸려' 바의 술병이 비워지고, 여행 막바지에 다소 내외하던 선원들과 합석하는 점심 정찬이 마련됐다. 급격히 스케일이 커진 파티는 승객의 호의가 도화선이었다. 멕시코 입국세를 대신 냈다는 선장의 배려에 모든 승객이 합심해 면세점의 술을 털었고, 배포 큰 선장은 야외 바비큐 파티를 열자고 몰아붙였다. 아, 코발트 빛 태평양이 바로 곁이었다. 여행자든 선원이든 전 탑승객의 여러 다른 삶이 태평양 위에 발그레하게 노출되었다. 장작불은 쉬이 꺼지지도 않았던가?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가치관의 인생이 뒤엉켰다.
언젠가 얀은 선원들을 대표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우린 진짜 이해가 안돼요. 대체 왜 화물선을 타는 거예요?" “글쎄요… 그걸 알고 싶어서인가 봐요.” 어떤 일탈과 낯섦이 우리의 삶을 끌고 가고 있었다.
강미승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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