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어찌하지 못할 때
체오름 분화구로 걸어 들어간다
그 안에서 깊은 한숨 내뱉고
나를 어루만지는 고요한 공기를 느낀다
갑작스럽게, 알 수 없는 이유로 벌어지는 일들이 있다. 때문에, 나는 괴로웠고 환자는 아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일부러 저지르거나 정황상 실수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려 애써야 했다. 모든 일엔 아무리 되돌아보아도 증명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증명되지 않는 일을 증명하려 애쓰는 일은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미 결과로 굳어버린 환자의 아픔은 내 고통을 깊숙이 몰아넣었다. 외롭고 괴로웠다. 어떠한 설명에도 이해를 받을 수 없었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나 심정적 수준의 이해와 위로만 오가는 상황 가운데서 나는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여전하던 환자의 고통은 서서히 상처와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간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이 오가는 도로 한복판에서 나는 쏟아지는 햇살을 핑계 삼아 눈 언저리를 훔쳤다. 나를 감싸는 소음과 존재들, 그리고 내 모든 것들이 공허했다.
괴로움과 공허함을 안고 차를 몰았다. 동쪽 송당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달리다 목장길 임도로 들어서서 키 높은 나무들 사이로 난 숲길 안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고, 시작되는 흙길을 따라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내 안의 공허함과 이따금 새소리만 들리는 숲길의 조용함은 공명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사람들이 많지 않아 바닥의 바위에도 이끼가 곳곳에 붙어있고, 키보다 높은 동백나무들이 줄이어 선 산길을 따라 걸었다. 오른쪽으로 멀리 오름의 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에는 곧 높이 자라 하늘을 메운 나무들에 녹음의 색을 품은 그늘이 지어졌고, 공간은 점점 고요하며 새소리는 점점 깊어졌다. 손 닿지 않은 듯한 나무들과 덤불들을 옆으로 지나 좀 더 깊숙이 들어가면 아까 멀리 보였던 오름의 분화구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오솔길 같은 작은 흙길을 제외하면 주변은 종아리 정도 올라오는 연한 풀들이 군락을 이룬다. 서서히 앞을 가로막는 둥근 분화구 안벽은 활엽림과 덤불이 손 닿지 않은 모습 그대로 웅장하게 시야 안으로 들어온다. 새들의 울음소리는 조금 더 다양해지고 잦아진다. 걸음을 조금만 더 옮기면 분화구 가운데 즈음, 나직하고 담담하게 홀로 자리한 담팔수가 어서 내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풍성한 이파리들과 두터운 줄기를 길게 늘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햇볕은 나뭇잎 사이로 잠깐씩 파고드는데 그리 눈부시지는 않았다.?그늘 안은 약간 습한듯 하면서 아늑했다. 공기는 마치 정지한 듯 이따금 부드럽게 내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거대한 분화구 안의 난대림은 새들의 놀이터여서 한 번씩 들리는 새 울음소리는 담팔수 아래의 나를 둘러싼 능선 안에서 두터운 겹으로 울렸다.
모든 기운이 차분하고 정숙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아무렇게나 널린 돌들도, 사람의 손에 의해 옮겨지거나 쌓여있는 돌들도 고요했다. 공간의 정점에 서 있는 담팔수 그늘 아래서 나는, 정숙한 기운에 기대어 나의 소란한 마음과 기분을 차분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늘 아래 앉아, 예민하게 반응했던 온 몸의 감각을 잠시 거두고 공간 안의 차분함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공간을 다시 벗어나면 나의 소란한 마음과 예민한 감각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자리를 찾을 것이다. 다시, 나로 인한 환자의 고통을 의식해야 하고, 나를 둘러싼 괴로움과 공허함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람들과 함께 하고, 사람들이 만든 기술과 공간 안에 살지만, 그것이 건네지 못하는 위로가 있다는 건 모순의 현실이다. 나는 잠시, 그 공간에서 벗어나 자연의 공간에서 내 공허와 괴로움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자연의 그러함에 공명하며 숨을 고른다. 나지막한 나무그늘의 차분함과 나를 감싸는 공기의 고요함은 깊은 위로였다.
내가 나를 어찌하지 못할 때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워질 때도 있다. 나에게 벌어진 일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함이 맞지만, 불가항력과 버거움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그럴 때, 나는 체오름을 생각한다. 그리고 고요한 분화구 안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간다. 그 안에서 깊은 한숨 한 번 내뱉고 내 얼굴을 어루만지는 고요한 공기를 느낀다.
나에게 체오름은, 말없이 어깨 쓰다듬어주고 나지막이 바라보아주는 깊은 위로이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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