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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 패배자라고? 내 주먹 맛 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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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포 패배자라고? 내 주먹 맛 좀 봐라"

입력
2016.06.18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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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백엔의 사랑'은 삶의 희망을 잃은 여인 이치코가 권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찾아가는 모습을 그린다. 미디어캐슬 제공

외모만 봐도 사회부적응자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장식처럼 얼굴에 얹어져 있다. 산발한 머리와 볼품 없이 커다란 몸이 절제를 잊은 생활 습관을 암시한다. 아니라 다를까.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초등학생 조카와 게임기를 두고 다투고, 여동생과는 서로 머리칼을 잡으며 몸싸움을 한다.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연인도 없는데 무엇보다 꿈이 없다. 누가 봐도 한심하다며 혀를 찰만한 이 여인의 나이는 32세. 삶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늦은 시기다. 가족들의 지청구에 시달리면서도 은둔형 외톨이를 자임하던 이치코(안도 사쿠라)는 어느 날 집에서 쫓겨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새로운 삶을 찾게 된다.

이치코가 밥벌이를 위해 찾은 곳은 100엔(약 1,100원)이면 무엇이든 살 수 있는 ‘100엔 숍’이다. 이치코는 일하게 된 가게에서 100엔이란 수식에 걸맞은, 실패한 인생들만 만난다. 가게의 점장이나 동료 직원들은 야비하거나 우울하다. 악다구니를 쓰며 살아가는 그들은 이치코가 넘어야 할 장애다. 서른 넘은 나이에 사회 초년병이 된 이치코는 그렇게 100엔 숍에서 정글 같은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이치코는 자신의 몸을 노리는 남자 직원의 흉계와 폭력에 맞서는 등 험로를 걸으며 ‘보통 삶’에 적응해 간다. 그리고 잊고 지낸 희망처럼 퇴물 복서 키노(아라이 히로후미)와 복싱이 이치코 앞에 나타나면서 이치코의 삶은 변곡점에 이른다.

영화 '백엔의 사랑'은 약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먹이사슬을 거부하며 약자들의 연대를 촉구하기도 한다. 미디어캐슬 제공

영화는 감동이란 평면적인 수식만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여러 들끓는 감정을 빚어낸다. 애처롭다가 통렬하고 씁쓸하다가도 어느새 환희를 안긴다. 남자에게 이용 당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이치코가 복싱으로 재활하는 모습은 특히나 눈물겹다. 이치코는 30년 넘게 겪은 실패와 좌절, 무기력을 단번에 날리겠다는 듯 샌드백에 주먹을 날린다. 한번도 뭔가를 이뤄낸 적이 없는 이치코가 링에 올라 성취욕을 불태우는 모습은 새로운 삶을 꿈꾸는, 세상의 모든 약자와 실패자를 대변한다.

영화는 이치코를 돋보기 삼아 약자와 약자의 관계를 들여다보기도 한다. 강자들에게 밀려난 약자들이 서로 먹이사슬을 형성하며 착취하고 착취 당하는 모습이 영화 속에서는 종종 등장한다. 먹이사슬에 새롭게 진입한 이치코는 약자들의 연대를 추구한다. 100엔 숍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만 훔쳐 먹는 노숙자에게 이치코가 베푸는 작은 시혜는 함께 사는 세상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영화는 한 개인의 유별난 삶에만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접근하지 않고, 하류 인생들의 보편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찬찬히 바라본다. 100엔짜리 인생이면 어떠냐고, 100엔짜리 사랑이면 또 어떠냐고, 뭐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영화는 세상의 패배자들에게 조용히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사쿠라의 연기만으로도 티켓 값이 아깝지 않다. 그는 오랫동안 집에서 칩거해온 이치코의 외모를 형용하기 위해 살을 찌운 뒤 복싱으로 몸이 날렵해지는 모습을 연출해낸다. 같은 배우가 연기하는 게 맞는 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전혀 다른 외모를 만들어낸 것 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만하다. 패배로 점철된 이치코의 삶이 첫 승리를 향해 내달리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가슴 졸이며 이치코를 응원하게 될 듯하다. 사쿠라의 연기가 만들어낸 공감도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를 대상으로 주어지는 넷팩상(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수상했다. 감독 다케 마사하루. 지난 16일 개봉했다.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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