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일하는 40세 정기원씨
“20대만큼 트렌드에 민감하고
발목 노출 백바지도 소화
젊은 오빠처럼 가꾸고
후배들과 소통해야 아재파탈”
초등교사 48세 박신영씨
“어설픈 조언자 역할보다는
얘기 들어주고 공감해 줘야
‘해봐서 아는데…’는 금물이죠
“‘아재’요? 그거 안 좋은 말 아닌가요?”
삼성물산 패션부문에서 일하는 정기원(40)씨는 지난 17일 첫마디에 이렇게 말했다. ‘꼰대’보단 덜하지만 아저씨란 호칭은 중장년 남성들에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대중가요 가사에서도 ‘제발 아저씨라 부르지마’(방송인 노홍철과 5인조 밴드 장미여관이 부른 ‘오빠라고 불러다오’ 중)라고 할 정도다. 아저씨는 성인 남성을 칭하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으레 ‘꼰대’와 동의어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런데 최근 아저씨보다는 좀더 친근하고 정겨운 표현의 아재라는 말이 퍼지면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부장님 개그’라고 면박을 들었을 법한 썰렁한 유머가 이젠 ‘아재 개그’로 인기를 끌면서 세대간 거리를 좁히는 역할도 하고 있다.
사실 아재라는 말엔 안쓰러움과 안타까움도 배어 있다. 꼰대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나이는 들었지만 ‘멋진 오빠’가 되기 위해 애를 쓰는 이들, 그러나 의지 만큼 머리나 몸은 따라 주지 않는 이들, 평생 너무 센 선배와 목소리 큰 후배 모두에게 치여 사는 이들이란 뜻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재와 ‘치명적인 매력의 남성‘을 뜻하는 ‘옴므파탈’을 합친 ‘아재파탈’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열린 사고와 멋진 패션 감각을 가진 중년 남성으로 거듭나고 싶은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정씨도 흰 양말에 샌들, 배바지 등으로 대표되는 구세대 패션은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20대 남성들만큼 트렌드에 민감하고, 나를 위한 소비도 마다하지 않는다. 발목이 살짝 보이도록 바지를 접어입고, 일명 ‘백바지’도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멋쟁이다. 정씨는 “패션에 대한 투자는 직장인으로서 최고의 재테크라고 생각한다”며 “남들이 보고 멋있다고 한마디 하거나 옷에 대해 물어올 때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단순히 외양만 ‘젊은 오빠’로 꾸미는 게 아니라 후배들과 소통할 줄 아는 게 진정한 아재파탈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정씨는 “업무시간 외 자리를 통해 후배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며 “먼저 자리를 마련하면 부담스러워할 수 있어 자연스럽게 그런 자리가 생기면 끼려고 한다”고 말했다. 회식은 일찍 끝내고, 노래방에 가게 되면 가능한 마이크를 잡지 않는 건 나름의 철칙이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후배들에게 잘해줘야 한다는 ‘착한 상사 콤플렉스’에 빠져 업무적으로 해야 되는 쓴 소리를 못할 때도 많다. 정씨는 “싫은 소리도 해야 하는 상사로서의 역할이 있는데 균형을 맞추는 게 쉽지 않다”며 “업무적으로 혼내면 따로 불러서 왜 그랬는지 설명을 해 오해를 풀어준다”고 말했다. 이젠 연애 상담도 해오는 후배가 생겼다.
그러나 종종 본전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신입사원일 땐 부장의 노래방 18번을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다니면서 무조건 고참에 맞췄는데 요즘 후배들에게 그런 것까지 바랄 수는 없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세대간 소통에 능한 아재파탈은 주변에서 각광받고 있다. 25년째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인 박신영(48)씨는 지천명을 곧 앞두고 있지만 3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동안이다. 얼굴만 동안일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나이 어린 친구들’도 제법 많다. 10년 이상 차이 나는 후배도 친구로 만들 줄 아는, 매력적인 아저씨다. 물론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도 많이 한다. 박씨는 “그럴 능력도 안 되는 조언자 역할보다는 그저 곁에서 얘기를 들어주고 감정적으로 공감해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평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즐겨 하는데다 여행과 맛집 탐방도 좋아해 젊은 세대와 대화를 쉽게 풀어나간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같은 태도는 금물이다. 무턱대고 가르치려 들면 곤란하다.
그런 그도 선배와 후배 사이에 끼어 어려울 때가 있었다. “선배들은 안 챙기면서 후배들 비위만 맞추려고 한다”는 타박을 받은 적도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뚜렷한 주관을 갖고 있다. 박씨는 “내게 주어진 시간과 체력은 한계가 있는데 더 잘할 수 있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쓰는 게 맞지 않느냐”며 “선배들보다는 자기 얘기를 하기 어려운 후배들이 약자라는 생각에 더 챙긴다”고 말했다.
이처럼 달라진 40대, 아재파탈의 전성시대 이면에는 ‘아저씨’란 권위를 내려놓고 적극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힘겨운 한국 중년 남성들의 욕구와 몸부림도 자리잡고 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아재파탈은 중년 남성들이 권위적인 모습을 내려놓고 이 사회의 또 다른 희생자나 약자의 이미지로 젊은 층과 소통하려고 나서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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