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중문화 흐름 선도
‘부장 아재’등 개그 코너 인기
이경규ㆍ김흥국 등 중견 예능인
아재 바람타고 ‘제2 전성기’
“아재 열풍은 일종의 놀이문화…
권위 전복시켜 카타르시스 느끼게 해”
성격ㆍ유형 따라 세분화
말 통하고 친근하면 ‘아재’
권위적ㆍ가부장적이면 ‘개저씨’
쿨한 척하는 개저씨는 ‘쿨저씨’


우선, 몸풀기로 가벼운 난센스 퀴즈 몇 개를 풀어보자. (1)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왕은? (2)야구선수가 왕에게 공을 던지면서 하는 말은? (3)가수 설운도가 옷을 벗는 순서는?
실험 삼아 한국일보 편집국 30~40대 기자 몇몇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봤다. 저마다 트렌드에 예민한 촉수를 가졌다고 자부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정답을 말하는 자는 없었다. ‘난센스’라고 힌트를 줬음에도 말이다. 정답을 공개하자 타박과 야유가 돌아왔다. 답은 ‘(1)최저임금 (2)송구하옵니다 (3)상하이(의)~ 상하이(의)~ 상하이(의)~’다. 이 퀴즈는 요즘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아재 개그’ 시리즈 중 일부다. 만약 정답을 듣고 웃음이 터졌거나 최근 이런 식의 말장난을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당신은 ‘아재 감성’의 소유자일 확률이 높다.
시대에 뒤떨어진 말장난이나 유치한 언어유희쯤으로 치부되던 아재 개그의 인기는 ‘아재’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탄생시키며 최근 대중문화의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그야말로 ‘아재 전성시대’다. 아재 개그와 아재 캐릭터는 이제 대중문화계의 인기 소재이자 주제다. SBS 예능프로그램 ‘웃음을 찾는 사람들’(웃찾사)이 새로 선보인 ‘부장 아재’ 코너는 직장 상사의 황당 개그에 억지로 웃어주는 인턴사원의 고충을 웃음의 소재로 삼고 있고, KBS2 예능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아재씨’ 코너는 ‘아재 악령’에 씐 사람들의 우격다짐 개그로 웃음을 선사한다. 개그맨 신동엽은 tvN 예능프로그램 ‘SNL 코리아’에서 ‘아재 셜록’ 콩트를 꾸몄다. “피해자는 싱글, 그러니까 범인의 이름은 벙글” 식의 아재 개그로 구성된 추리극이었다.
중견 예능인들은 아재 바람을 타고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다. 개그맨 이경규는 MBC 예능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이후 ‘킹경규’, ‘예능황제’, ‘예능대부’라 불린다. 시청자들은 이경규가 방바닥에 드러누워 방송을 하자 ‘눕방’이라 칭송하고, 낚시를 하면 ‘낚방’, 승마를 하면 ‘말방’이라 부르며 환호했다.
김흥국의 부활은 더 극적이다. 지난해 MBC 예능프로그램 ‘세바퀴’에서 김흥국이 조세호에게 “안재욱 결혼식에 왜 안 왔냐”며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자 조세호가 “모르는데 어떻게 가냐”며 억울해하는 장면이 온라인에서 최근 뒤늦게 화제가 된 것이 시작이었다. 조세호를 ‘불참의 아이콘’으로 만든 김흥국을 두고 네티즌은 ‘흥궈신’이라 불렀다. 중국어에서 국(國)을 ‘궈’라고 발음하는 데서 착안한 ‘흥궈’와 ‘신(神)’의 합성어로, 예능의 신이란 뜻이다. 김흥국은 컴퓨터 게임 용어인 치트키(Cheat Key·컴퓨터 게임을 쉽게 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조작할 때 사용하는 문장)에서 파생한 ‘예능 치트키’라는 신조어도 갖고 있는데, 정작 김흥국 본인은 치트키의 뜻을 잘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흐름에서 보듯 아재 열풍의 핵심은 형태나 내용이 아니다. 아재 캐릭터 자체가 더 중요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똑같은 아재 개그라도 발화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호응을 얻을 수도, 반감을 살 수도 있다”며 “그 사람의 호감도나 그가 지나온 행적에 대한 평가가 아재 캐릭터의 인기를 좌우한다”고 말했다. 무례하게 비춰질 수 있는 질문도 어딘가 허술한 구석이 많은 김흥국이라서 희화화됐듯, 대중은 어떤 아재 캐릭터냐에 따라 반응을 달리한다는 설명이다. 한 예능 관계자는 “젊은 세대에게 아재는 풍자적 의미”라며 “최근의 아재 열풍은 일종의 놀이문화로 권위를 전복시켜 카타르시스를 느끼려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로 유명한 그룹 노라조의 조빈은 최근 ‘아재’라는 신곡을 발표했다. ‘나는야 아재, 캐드립 천재 / 난형난제, 우리는 형제’ 같은 식으로 가사가 몽땅 아재 개그다. 그러다 문득 자조하듯 노래한다. ‘내가 부끄럽니? 내가 실수했니? 나는 너희가 좋아. 우리랑 계속 놀아주라’라고. 이렇듯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어울리고 싶어하는 아재들은 자신을 스스로 희화화하는 형식으로 소통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노력이 아저씨가 아닌 아재를 만든다. 10~20대가 아재들에 환호하는 근본에는 기성세대의 아주 작은 태도 변화가 있다. 정덕현 평론가는 “아재 개그나 아재 캐릭터가 크게 재미를 주진 않는다”며 “세대간 소통이 꽉 막혀 있는 사회에서 기성 세대가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자체에 젊은 세대가 호응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중년 남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아재인 것은 아니다. 아재는 ‘말이 통하는’ 아저씨다. 친근하고 귀여운 이미지까지 품고 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속칭 ‘개저씨’라 불린다. ‘개(멍멍이)’를 접두사로 붙여 ‘개념 없음’을 강조했다. 권위적이고 고리타분하며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지닌 기성세대를 조롱하는 의미다. 평등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전자라면,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막말을 일삼는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트럼프는 후자다.
개저씨가 심해지면 ‘꼰대’가 된다. tvN 드라마 ‘미생’에서 성차별적인 대사와 행동으로 시청자의 공분을 샀던 마 부장(손종학)이 대표적인 개저씨이자 꼰대다. 꼰대는 “우리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하여간 요즘 젊은 애들은 4가지가 없어”라는 말을 달고 산다.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신구가 연기하는 권위적인 캐릭터는 ‘꼰대의 끝판왕’쯤 되겠다.
말이 통하는 걸 넘어서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아재들에겐 ‘아재파탈’이란 로맨틱한 수식어를 붙인다. tvN 드라마 ‘시그널’의 조진웅, KBS2 드라마 ‘아이가 다섯’의 안재욱,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 김상중, tvN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의 차승원이 이 범주에 묶인다. 기부천사 션, 국민MC 유재석, ‘19금 개그황제’ 신동엽도 아재파탈에 넣을 만한, 호감도 높은 아재로 분류된다.
아재의 파생어 중엔 쿨저씨도 있다. 겉으로는 쿨한 척, 배려하는 척, 이해하는 척하지만, 본질은 개저씨인 아재를 일컫는다. 직장 내 남녀평등을 내세우면서 ‘평등’과 ‘소통’을 이유로 여성 직원들이 불쾌할 만한 음담패설을 태연스럽게 늘어놓는 남자 상사들이 쿨저씨에 해당한다.
아재 캐릭터는 그 성격과 유형에 따라 개저씨, 꼰대, 아재파탈, 쿨저씨 등으로 세분화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서 중년 남성에 대한 이미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재 열풍도 한 꺼풀 벗겨내고 속을 들여다 보면, 아재라 불리는 이들이 과거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경규는 ‘짜증 개그’과 ‘호통 개그’의 대명사였다. 김흥국은 해병대 출신을 내세우며 밑도 끝도 없이 축구 사랑을 부르짖고 다니던 ‘옛날 연예인’ 이미지가 강했다. 두 사람 모두 젊은 세대에겐 불통과 권위의 상징 같은 존재였다. 이경규의 ‘눕방’이나 ‘낚방’도 시청자를 배려한 것이라기보단 자신이 하고 싶은 방송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게 우연찮게 먹혀 들어 탄생했다. 신동엽의 19금 개그는 아재 열풍 이전부터 해오던 것이고, 아재 개그 자체도 ‘부장님 개그’라는 이름으로 줄곧 존재해 왔다.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다만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바뀌었을 뿐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기성세대가 꼰대가 아니길 바라는 젊은 세대의 바람이 아재라는 단어에 투영돼 있다”면서 “우리 사회에 꼰대만 많고, 존경할 만한 진짜 어른을 찾기 어려운 현실의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예능 관계자도 “아재와 꼰대는 한 끗 차이일 뿐”이라 짚으며 “아재가 꼰대로 바뀌는 순간 아재 열풍은 금방 식어버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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