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게이잡지 ‘애티튜드’의 표지 모델로 등장한 윌리엄 윈저 왕세손. 출처: Attitude

지난 15일(현지시간) 영국의 윌리엄 윈저(34) 왕세손이 게이 잡지 ‘애티튜드’의 표지 모델로 깜짝 등장했다. 윌리엄 왕세손은 환하게 웃는 얼굴에 흰색 셔츠 차림이었고, 잡지 표지는 “역사를 만들다. 윌리엄이 애티튜드를 만나다”는 제목을 달았다. 애티튜드는 영국 최대의 게이 잡지로, 영국 왕족이 동성애 잡지의 모델로 나선 것은 처음이다.

영국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족이 동성애를 옹호하고 대중이 거부감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동성애의 달라진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성애가 숨기거나 차별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회가 받아들여야 하는 개인의 성적 정체성으로 폭넓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왕세손도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없애자는 취지에서 모델 제안을 수락했다고 한다. 왕세손은 잡지 인터뷰에서 “누구도 성정 정체성이나 다른 이유로 따돌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입장을 분명히 드러냈다.

영국뿐 아니라 서구사회 전체가 동성애에 너그러워지는 추세다. AFP 통신 등에 따르면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 전 세계 22개국이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고 있다. 반면 동성애가 사회 전면에 등장함에 따라 동성애자를 노린 ‘증오 범죄’도 고개를 들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16일(현지시간) ‘성 소수자가 증오범죄의 타겟이 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사회가 성소수자에 더 관대해질수록 반대론자들은 동성애 확산을 막기 위해 더 과격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탈리아 동성애자 인권 운동가들이 지난달 11일 의회에서‘동성결합 법안’이 통과됐단 소식이 전해지자 관광 명소인 트레비 분수 앞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며 환호하고 있다. 로마=AP 연합뉴스
동성애자 인권 존중 확산 움직임

지난달 11일 이탈리아 의회가 동성애 커플에 합법적 권한을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로마 트레비 분수 앞에 모인 수백명의 동성애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탈리아에서는 수차례 동성 커플 결합을 법제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보수적인 바티칸 등 가톨릭의 영향으로 번번이 좌절됐다. 이탈리아가 동성애에 빗장을 열며 유럽연합(EU)의 28개 회원국들은 모두 동성 간 법적 결합을 인정하게 됐다.

동성애자의 권리 존중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유럽이다. 2001년 네덜란드가 동성 결혼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합법화했고, 2009년 북유럽의 스웨덴과 노르웨이에 이어 2013년부터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핀란드, 아일랜드 등으로 순차적으로 확산됐다.

유럽에서는 동성애를 공개적으로 밝힌 정치인도 상당수다. 독일 부총리 겸 외교장관 기도 베스터벨레, 벨기에 총리 엘리오 디 뤼포, 룩셈부르크 총리 자비에르 베텔은 ‘커밍 아웃’을 한 게이다. 스코틀랜드보수당 대표 루스 데이비슨과 아이슬랜드의 첫 여성 총리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는 레즈비언이다. 영국의 전 하원 부위원장인 나이젤 에반스 의원은 “정치인이라 커밍아웃 하기 힘들었지만 밝힌 뒤 보다 큰 지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단순히 동성애를 합법화 했을 뿐 아니라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불이익도 상당히 개선했다는 의미다.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이 지난해 6월 동성 결혼에 합헌 판결을 내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됐다. 하지만 동성 결혼에 대한 찬반 논쟁은 오히려 가열되고 있다. 공화당 대선 주자였던 벤 카슨은 “동성 결혼 허용은 지난 20년간 최악의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로이 무어 앨라베마 주 대법원장도 동성 결혼을 강력히 반대하다 직무가 정지될 정도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

특히 미국 사회는 ‘트렌스젠더는 남녀 화장실 중 어떤 화장실을 써야 하는가’를 두고 양분되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지난달 “트렌스젠더 학생들이 성 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이용하게 하라”는 지침을 마련했지만, 동성애 반대 입장을 취하던 텍사스 등 11개 주에서는 “다른 학생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한다”며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다만 여론조사기관 ORC에 따르면 ‘트렌스젠더가 취업, 주택 구입 등에서 동등한 보호를 받게 하는 법률이 있다면 지지하겠냐’는 질문에 75%가 긍정적으로 답변하는 등 미국 여론은 반 동성애 진영에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게이 나이트 클럽에서 12일사상 최악의 총기참사가 발생한 가운데 부상자들이 옮겨진 인근 병원을 찾은 가족들이 입원자 명단을 확인한 후 오열하고 있다. 올랜도=AP 연합뉴스
동성애 혐오범죄도 덩달아 증가

동성애가 합법화되고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전면에 드러남에 따라 이들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다. 2014년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동성애자를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는 1,017건 발생해 인종ㆍ종교 등으로 인한 전체 증오범죄의 18.6%를 차지했다. 영국 내무부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역에서 2015년 게이와 레즈비언을 대상으로 한 증오범죄가 5,597건 발생해 전년도에 비해 22%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캘리포니아대의 그레고리 헤렉 심리학과 교수는 “일부 동성애 반대론자들은 동성애자의 권리가 확산되는 현상에 위협을 느낀다”며 “이런 추세를 바꾸기 위해 ‘세상에 충격을 가해야 한다’는 극단주의자로 변하게 된다”고 NYT에 말했다.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동성애자를 테러의 표적으로 삼고 있는 점도 불안요소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으로 기록될 플로리다주 올랜도 총기참사는 이슬람 원리주의(지하디스트)와 증오범죄가 얽힐 때 나타나는 극단주의의 실상을 보여준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윌 매켄츠 선임 연구원은 “서구의 동성애에 대한 관용은 바로 무슬림들이 서구사회를 거부하고 IS에 가입하는 이유”라고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말했다. 동성애에 대한 존중이 역설적으로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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