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테 안경
조르조 바사니 지음·김희정 옮김
문학동네 발행·168쪽·1만1,000원
‘나는 세계의 정회원이 아니다.’ 이런 느낌을 일평생 떨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독은 숙명이다. 세계 속에 있지만, 실은 세계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소외감. 여기는 ‘내’가 어찌해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나’는 그저 발현되지 않으려 분투하며 잠복해 있는 존재일 뿐. 무솔리니의 유대인 박해가 공포된 1930년대 후반의 이탈리아에서 늙은 동성애자와 유대인 청년은 그렇게 세계의 정회원이 아닌 서로를 알아본다. 젖이 퉁퉁 분 채 안개 낀 밤거리를 헤매 도는 길 잃은 어미개까지, 그들은 끝이 들여다 보이지 않는 고독의 삼각형을 만든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소설가 조르조 바사니(1916-2000)의 ‘금테 안경’(1958)은 슬픔을 부르짖는 대신 침묵하고,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점잖은 헛웃음을 짓는, 담담해서 오히려 목이 메는 소설이다. 유대인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북부의 소도시 페라라에서 성장기를 보낸 작가는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네오리얼리즘 소설들을 선보이며 페라라를 이탈리아 문학사에 깊이 아로새겼다.
유대인 박해를 공식화한 무솔리니의 인종법 시행(1938-1943)으로 파시즘에 동조했던 유대인 부르주아들은 심각한 곤경에 처한다. 이 상처가 바사니 문학에 인장처럼 박혀 있어, 페라라는 그의 소설의 일관된 배경으로 ‘페라라 소설’이라는 또 하나의 장르를 만들어냈다. 반파시즘 항쟁에 적극 가담했던 작가는 문화적, 예술적 소양이 삶 속에 공기처럼 삼투해 있던 부르주아적 생활에 대한 향수와 파시즘이라는 야만적 시대의 도래에 순진하고 우둔하게 대처했던 부르주아들의 한계 앞에서 냉소와 애상 사이를 오가며 양가적 감정을 보인다. 이탈리아 현대문학의 거장 이탈로 칼비노가 “전후 등장한 가장 수준 높은 작가 중 하나”로 바사니를 꼽으며 “이탈리아 부르주아 의식의 혼란상을 파헤치는 소설가”로 명명한 이유다.
소설의 어조와 분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금테 안경을 쓴 베네치아 출신의 중년 의사 아토스 파디가티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페라라로 옮겨와 승승장구하며 마을의 존경을 받지만 동성애자임이 드러나며 서서히 몰락해 가는 게 전반부. 후반부는 볼로냐대학 문학부에 다니는 유대인 중산층 가문의 ‘나’가 인종법 시행으로 돌연 세계 바깥으로 내쳐지게 되는 내적 위기를 그린다.
다소 활달하고 희비극적인 전반부와 암울하고 비극적인 후반부는 페라라의 부르주아들이 가족 휴가를 보내는 아드리아 해안의 리초네 해변에서 강렬하게 접합된다. 아이였을 때부터 주치의였던 파디가티 의사 선생님에게 기차 안에서 생식기 진찰을 해달라며 모욕과 조롱을 일삼던 미남 청년 델릴리에르스가 바로 그 의사 선생님과 연인이 되어 리초네 해변으로 여름 휴가를 온 것. 휴가지의 상류 중산층 가정들에게 이 사건은 추문이다. 그러나 이 추문을 통해 늙은 부르주아 게이의 깊은 슬픔과 박멸의 공포에 시달리는 유대인 청년 ‘나’의 고독은 하나의 고리로 엮인다.
“잠시 뒤 해변에서 파라솔 아래에 있는 파디가티 선생님이 멀찍이 보였다. 나는 불현듯 그가 치유할 수 없는 끝없는 고독에 방치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파디가티 선생님이 사준 멋진 자동차를 타고 다른 해변의 자매를 유혹하러 가자는 옛 친구 델릴리에르스의 제안을 뿌리친 ‘나’는 “적어도 나는 선생님을 기만하지 않았다”고 느끼며 그의 고독에 자신의 고독을 투영한다. 도시의 신사복을 입고 예의 점잖고 우아한 품격을 잃지 않는, 그래서 더욱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해변의 이 부르주아 게이는 흔히 예상할 수 있듯 미청년 애인에게 한껏 이용당한 후 비참하게 버림 받는다. ‘나’는 “자신을 멸시하는 연인으로 인한 그의 고통”에 “연민보다 혐오감”을 먼저 느끼지만,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밖으로 내쳐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불청객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속에서 그와 친구가 된다.
하지만 그 우정은 힘이 매우 약하다. “더없이 완전한 고독 속에서 모두의 적대감에 둘러싸인 이런 삶을 평생 지속할 수 있을까?” 몇 번 쓰다듬어 주자 전 존재를 기투하듯 의사에게 달라붙어 손과 얼굴을 핥아대는, 젖이 퉁퉁 불어있는 거리의 잡견은 두 남자가 공유하는 심연의 고독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비정하리만큼 담담한 마지막 비극은 늙은 게이와 유대인 청년과 길 잃은 개가 함께 걷는 안개 낀 밤거리 덕분에 날렵한 단검처럼 독자를 가격한다. 유대인 박해 정책이 외교적 술수일 뿐이라는 고위 공직자의 말에 가족 모두가 기뻐할 때 ‘나’가 이전보다 더 큰, “총체적이며 결정적인” 고독감을 느끼는 것은 이미 고독의 심연을 들여다 본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탈리아 정부 지원으로 국내 첫 번역되는 작가다. 단편집 ‘성벽 안에서’와 장편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도 함께 출간됐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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