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유로 2016 B조 2차전이 열린 16일(한국시간) 프랑스 랑스의 스타드 볼라르트 델레이스. 이곳에는 딱 두 가지 색만 존재하는 듯 했다. ‘삼사자 군단(잉글랜드 대표팀 애칭)’의 유니폼인 흰색과 웨일스의 상징인 붉은색. 본부석을 중심으로 왼쪽은 흰색, 오른쪽은 붉은 물결로 넘실댔다.
‘영국더비’로 큰 관심을 모았던 두 팀의 격돌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잉글랜드가 후반 추가 시간 터진 다니엘 스터리지(27ㆍ리버풀)의 결승골에 힘입어 2-1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지만 웨일스도 ‘위대한 패자’였다. 영국 언론 인디펜던트는 ‘웨일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날에 근접했다’고 표현했다. 1차전에서 러시아와 1-1로 비겨 다소 불안한 출발을 보였던 잉글랜드는 이날 승리로 1승1무(승점4)가 되며 조 선두로 올라섰다. 웨일스(1승1패)와 슬로바키아(1승1패ㆍ이상 승점3)가 공동 2위, 1무1패를 당한 러시아는 꼴찌로 밀렸다.
웨일스의 가레스 베일(27ㆍ레알 마드리드)이 드라마의 시작을 알렸다. 베일은 전반 42분 잉글랜드 웨인 루니(31ㆍ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파울로 얻은 프리킥 키커로 나섰다. 그는 지난 12일 슬로바키아와 1차전에서도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넣는 등 평소 강력한 무회전 킥을 자랑하지만 이번에는 거리가 좀 멀었다. 하지만 베일의 왼발 슛은 상대 수비벽을 넘어 골문 앞에서 뚝 떨어졌다. 잉글랜드 골키퍼 조 하트(29ㆍ맨체스터 시티)가 사력을 다해 손을 뻗었지만 공은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골대까지 거리는 무려 35야드(32m)였다. BBC에 따르면 베일은 1984년 프랑스의 미셸 플라티니와 1992년 독일의 토마스 하슬러 이후 유로 대회에서 2경기 연속 프리킥을 넣은 세 번째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또한 1984년 마크 휴즈 이후 잉글랜드를 상대로 골을 성공시킨 첫 웨일스 선수가 됐다.
하지만 후반은 잉글랜드를 위한 무대였다.
로이 호지슨(69) 잉글랜드 감독은 후반 시작과 함께 벤치에서 대기하던 제이미 바디(29ㆍ레스터시티)와 스터리지를 투입해 승부수를 던졌다. 8부 리그 공장 노동자에서 지난 시즌 레스터시티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끈 ‘인생 역전의 주인공’ 바디는 투입된 지 11분 만에 동점골을 꽂으며 기대에 부응했다. 그의 유로 데뷔전 데뷔골이었다. 이대로 끝날 것 같던 경기는 스터리지로 인해 또 한 번 요동쳤다. 후반 45분 페널티지역 왼쪽에서 볼을 주고받으며 쇄도한 뒤 오른발 슈팅으로 그물을 갈랐다. 스터리지의 극장골이 터지는 순간 잉글랜드 주장 루니는 TV 중계 카메라를 붙잡고 흔들며 감격을 주체하지 못했다. 더 선은 스터리지의 이름을 빗대 “스터 크레이지(sturr crazy)가 승리를 이끌었다”고 했다.
1984년 친선경기(1-0 승) 이후 32년 만에 잉글랜드를 상대로 승리를 노렸던 웨일스의 도전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하지만 웨일스는 러시아와 최종전 결과에 따라 충분히 16강에 오를 수 있는 상황이다. 베일은 “팀원 모두가 자랑스럽다. 우린 100% 힘으로 싸웠다. 후회는 없다. 앞으로 1경기가 남아있고 토너먼트 희망이 끊어진 건 아니다. 생존을 위해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벼랑 끝에서 살아난 호지슨 감독은 “내가 만약 잉글랜드가 아닌 제 3자의 입장이었다면 웨일스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다”며 “그러나 나는 우리 스스로 승리를 즐기길 원하고 그들은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야 할 것이다”고 자축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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