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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

입력
2016.06.1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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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즘’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것’을 일컫는데,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에서 연유했다. 수도원 기숙학교 시절 값싼 낭만주의 소설에 심취했던 주인공 엠마는 끝내 이 환상의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몰고 간다. 플로베르가 이 인물의 심리와 행동에 준 언어적 표현의 생생함과 적확성,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문학적 스타일의 구축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결혼 생활에 대한 낭만적 환상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을 끝내 성숙한 눈으로 수습하지 못하는 엠마의 비극은 작가가 그녀에게 넘겨준 원숙하고 냉철한 언어적 표현의 힘 때문에 더욱 도드라진다. 플로베르가 구사한 정밀한 언어적 표현은 엠마라는 인물의 구체적 현실과 느낌 안에서 자라나온 것이되, 그녀의 미숙한 지성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 이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비판적 검토와 숙고를 거친 그 언어들이 진정 엠마의 소유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스스로를 파멸의 길에서 구할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작가는 무슨 권리로 이런 일을 하는가. 남의 불행을 내려다보며 말이다. 한 가지 답은 플로베르가 직접 우리에게 주었다. “엠마 보바리는 바로 나 자신이다.” 엠마의 저 환상병(幻想病)은 바로 플로베르 자신이 혹독하게 앓고 있던 낭만적 질병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초라한 현실을 외면하고픈 우리의 자기기만 안에 엠마의 이야기가 언제든 끼어들 수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얼마간 엠마 보바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작가들에게 인간 불행의 관찰자 자리를 선뜻 내어주고 그것을 기리기도 하는 이유를 이런 지점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싶다. 그렇다는 것은 문학이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타인의 이야기를 전개할 권리가 그리 허투루 얻어질 수 없다는 말도 된다. 그런데 우리가 문학 작품에서 남의 불행을 읽을 때 우리 역시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질문을 떠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권여선의 단편 ‘이모’(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창비)에 나오는 50대 후반 윤경호라는 여성의 인생은 쓰라려서 옮기기가 저어될 정도다. 그녀는 가족이라는 덫의 희생양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고약한 운명의 여신에게 저당 잡힌다. 얼마 안 되는 사랑의 기회조차 그녀를 이상한 방식으로 모욕하며 비껴간다. 그러나 그녀는 나름대로 몹쓸 인생에 대한 반격을 준비해왔는데, 최소한의 자립 기반을 마련한 뒤 가족과의 절연을 선언한다. 그녀 나이 55세 때이다. 그리고 2년 뒤 병에 걸린 몸으로 나타나고 곧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그 2년 동안 그녀가 누린 자유조차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한 달 35만원으로 생활하며 매일 도서관에서 책 읽기. 하루 네 대의 담배, 일주일에 한 번의 음주. 사실 이 소설의 핵심은 그렇게 잠적을 결심하게 된 어느 겨울날 하루에 있을 것이다. 그날 하루 그녀의 내부에서 끓어올랐던 세상에 대한 증오와 적의, 격렬한 자기 응시의 드라마는 이 소설의 백미인데, 그 전율스런 음미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자. 죽기 직전, 그녀는 스스로를 아무에게도 가닿지 못했던 불가촉천민으로 칭한다. 그녀 이야기의 청자이자 소설의 화자인 조카며느리 ‘나’는 그녀의 유산으로 입금된 통장의 숫자를 오래 들여다본 뒤 이렇게 말한다. “그 숫자들은 그녀와 세상 사이를, 세상과 나 사이를, 마침내는 이 모든 슬픔과 그리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처럼도 여겨졌다.” 생각해보면 이 ‘아득하고 불가촉한 거리’는 우리가 모든 불행의 이야기를 관전한 대가로 돌려받는 냉혹한 심문이자 탄식은 아닐 것인가. 물론 그것은 문학이 주는 또 다른 아이러니한 선물이기도 한데, 인간의 윤리가 개시되는 자리가 그 언저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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