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6월 16일
헝가리 전 수상 임레 너지(Imre Nagy, 1896~1958)가 1958년 6월 16일 별세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체제에 저항하며 헝가리의 독자적 민주화 노선을 추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커포슈바르(Kaposvar)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코민테른헝가리 대표를 지냈고, 2차대전 후 헝가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라코시 마티아시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거쳐 53년 수상이 됐다. 그 해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서기장이 됐고, 권력 교체기 헝가리 시민들의 저항도 함께 시작됐다. 근로자들은 파업을 벌였고, 집단 농장체제의 곤궁한 농민들도 거기 가세했다. 이웃 나라 유고의 자주관리체제 등 독자주의 실험도 헝가리를 고무시킨 변수였다. 신임 수상 너지는 농업 집단화제도를 폐지하고 강제수용소를 없애는 등 친 자본주의적 민주적 개혁 정책으로 시민들의 요구에 호응했다. 그는 헝가리의 인기 있는 지도자였으나 소비에트 제국으로선 미덥지 않은 수족이었다. 55년 4월 그는 실각했고, 집권 근로자당으로부터도 제명당했다. 후임은 ‘작은 스탈린’이라 불리던 라코시 마차시였다.
56년 2월 흐루시초프의 공산당 20차 당대회 비밀연설을 기점으로 스탈린 격하가 시작됐다. 이웃 체코에서는 민족주의 성향 개혁파 사회주의자 고무르카가 당서기에 취임했다. 10월 헝가리 봉기가 시작됐다. 시민들은 복수정당제와 소련군 철수, 표현ㆍ사상의 자유, 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하며 다시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경찰 발포에 맞서 군 무기고를 털었다. 임레 너지는 복권됐고, 다시 수상에 취임했다. 그는 바르샤바조약기구 탈퇴와 헝가리 중립국화 등 시위 대중의 요구를 거의 전면적으로 수용한 일련의 개혁조치를 발표했다. 그 결과가 56년 11월 소련 즉 바르샤바 조약군의 부다페스트 침공이었다. 헝가리 시민 2,500여 명이 숨졌고, 1만 3,000여 명이 부상 당했다. 나토의 개입을 기대하던 너지와 각료들은 유고 대사관으로 피신하지만 KGB의 체포돼 2년 뒤 비밀재판을 거쳐 교수형 당했다. 헝가리 민주주의는 이후 30년간 철저히 억압 당했다.
그는 냉전 체제 서방의 영웅이었고,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헝가리 민주주의의 상징적 존재로 추앙 받고 있다. 무능하고(그는 정세를 오판했다), 무모하고(명분만 보고 현실을 외면했다), 무책임한(대중의 뜻만 좇았다) 정치인이라는 비판도 물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