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한국 드라마로 불 붙어
팬클럽 회원만 1300여명으로
2014년 문화클럽 문 열며 본격화
음악ㆍ영화ㆍ음식으로 관심 확산
시민들 “한국과 수교 머지않았다”
지난 5일 쿠바의 한국문화원 격인 호세 마르티 한국 쿠바 문화클럽에 뜻밖의 한국 손님이 찾아왔다. 윤병세 외교부장관이다. 그는 방명록에 ‘쿠바이민 95년을 맞는 시기에 한국 외교장관으로서는 최초로 쿠바를 방문하고, 한인후손회관을 찾게 되어 기쁘다’고 적었다.
라틴아메리카 33개국 중 유일한 미수교국인 쿠바이지만, 이렇듯 한국과 쿠바와의 인연은 10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10일 찾은 문화클럽은 330㎡ 규모의 2층 건물로 크지는 않았지만, 대한민국 지도와 태극기, 한복, 색동 고무신 등 한국관련 자료들이 빼곡했다. 바로 옆 이민역사 유물전시관에는 고국을 떠나 멕시코에서 쿠바로 넘어온 애니깽 이민 1세 사진과 명부, 2004년 국립묘지에 안장된 임천택 선생의 사진 등이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애니깽은 선박용 밧줄을 만드는데 쓰인 선인장인 ‘에네켄’에서 유래한 말로, 1900년대초 중남미로 건너간 한인 1세들의 별칭이기도 하다. 혹독한 환경속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거친 1세들은 2세, 3세들은 고국어를 가르칠 여유나 형편조차 없었고, 그렇게 한국과의 인연은 영원히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전 세계를 강타한 한류 열풍은 쿠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쿠바 국영방송이 지난 2013년부터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불붙기 시작한 한류바람은 현재 1,300여 명의 팬클럽 회원을 갖게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최근 한국과 쿠바 외교장관의 회담 후 수교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한류는 순풍에 돛을 달고 있었다.
2013년 쿠바에서는 ‘아가씨를 부탁해’, ‘시크릿 가든’, ‘내조의 여왕’ 등 한국 드라마 세 편이 연달아 방송되면서 시청자 호응도가 2위로 치솟았다. ‘시크릿 가든’에 출연한 탤런트 윤상현은 드라마가 대박나면서 단연 쿠바의 연인이 됐고, 그 해 한국 연예인 중 처음으로 쿠바 땅을 밟았다.
그 바통을 이민호가 이어받고 있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와 ‘시티헌터’, 영화 ‘강남 1970’ 등에 힘입어 이민호는 쿠바 소녀들의 우상이 됐다.
아바나에 사는 한인 5세 멜라니(19)양은 “슈퍼주니어와 EXO도 좋아하지만 이민호가 제일 멋있다”며 “쿠바에서 이민호 얼굴을 실물로 한 번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쿠바의 한류 열풍에 힘입어 2014년 8월15일 광복절에 문화클럽이 수도 아바나 신시가지에 문을 열었다. 쿠바 내 유일한 한국어교실이 이 곳에 오픈했고, 국어교과서와 소설 ‘완득이’, 글짓기 책 등이 교재로 활용되고 있었다. 고국의 음악과 영화, 드라마 등을 즐길 수 있는 시청각실도 단연 인기였다.
쿠바한인회장 안토니오 김(73)씨는 멕시코와 쿠바에서 살던 한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한인 3세로, 그 역시 이 곳에서 처음으로 한국어를 배웠다. 1년간 초급한국어를 공부했다는 그는 서툴지만 차근차근 “안녕하세요, 김치, 불고기 맛있어요”라고 말한 뒤 활짝 웃었다.
부모 세대의 아픈 과거를 숱하게 들었을 터여서 조국을 원망할 법도 하지만 김씨는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 살기 힘들어진 선조들이 이주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미그기 조종사를 꿈꾸다 부상을 입어 쿠바 공군 정비사로 제대한 그는 쿠바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김씨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요즘 들어 부쩍 가슴에 와 닿는다”며 “조국 대한민국이 쿠바의 일상에 바짝 다가온 증거”라고 전했다.
이 곳에서는 매주 월, 화요일 오후 6∼8시 한국어교실이 열리고 있는데, 한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3년 과정의 수업에 30여 명이 공부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음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화클럽은 한 달에 1번 현지인들에게 비빔밥과 불고기 등 한국음식 만들기를 선보이고 있다.
매주 토요일은 한류의 날로 자리잡고 있다. 한류 팬클럽 회원 200여 명이 문화클럽 등에 모여 한국 영화 DVD도 보고, 노래에 맞춰 춤도 추는 등 한류 마니아 층이 두터워지고 있다. 쿠바의 개방과 한류 바람으로 지난해 쿠바를 방문한 한국인은 모두 7,500명에 이른다.
1959년 카스트로 혁명 후 한ㆍ쿠바 국교 단절로 왕래가 끊겨버린 한인 후손들에게는 최근 한 가닥 희망이 생겼다. 지난 5일 양국 외교장관 회담으로 국교 정상화의 기대감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이라고 가만 있지는 않았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지난달 24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1비서와 회담했다. 북한이 전통 우방인 쿠바와 유대강화에 나서면서 우리의 외교력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현지 관계자는 “한ㆍ쿠바 장관 회담이 비공개로 진행된 것은 북한을 의식한 쿠바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며 “한국 말대로 한ㆍ쿠바 수교가 ‘북한을 잃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친구를 얻는 것’이라면 수교 신청을 한국이 하고, 쿠바가 받아들이는 모양새를 갖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1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아바나의 북한대사관 측은 미국과 쿠바의 국교정상화에 이어 한ㆍ쿠바 관계 정상화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바나 시민 칸디도(55)씨는 “국교가 있는 북한에서는 관광객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만 미수교국인 한국의 관광객이 해마다 증가하는 것은 아이러니”라며 “쿠바가 한국과 수교할 날도 머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바나(쿠바)=글ㆍ사진 전준호기자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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